북녘 동포 여러분! 지구상에 나라별 면적 순위를 따지면 북한은 200여개가 넘는 국가 중에 100번째 정도 됩니다. 그런데 북한 면적의 약 142배인 700만 평방킬로미터인 러시아에도 북한만큼 동상이나 사적비, 사적탑 등 건축조형상징물들이 많지 않습니다.
북한에는 200여개의 시군 소재지들과 3,200여 개의 리 소재지, 260여 개의 노동자구들에 동상과 영생탑, 대형 주제화, 태양상, 기념비들이 세워져 전 세계에서 가장 건축조형상징물 건립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얘기한 동상에 이어 기념비와 기념탑들을 포괄하는 대기념비들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인민을 위한다면서도 가장 인민을 천시하는 성분토대제도를 만들고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3대에 걸쳐 한 가족 안에서 봉건왕족국가들처럼 세습권력독재를 유지하는 북한, 거기에 같은 동족을 죽이기 위해 만든 핵과 미사일 또 생화학무기를 가지고 우리 민족은 물론 지구촌의 모든 인류를 위협하려 드는 가장 가난한 나라임에도 태양이요 광명성이요 하면서 이런 건축조형상징물들을 통해 세뇌 선전을 극대화하는 북한은 아무리 봐도 사람 못살 세상입니다.
정치인들과 국가지도자의 지도력이나 평판은 그 나라의 국민들을 얼마나 마음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하는가에 따릅니다. 국가지도자의 능력은 그가 권력을 행사하는 기간에 그 나라의 정치적인 안정이 잘 보장되고 있는 것과 동시에 경제발전 정도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북한은 70여 년 전에 김일성이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고 기와집에서 살게 하겠다”고 한 것이 지금 손자 대인 김정은시대에 와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만 봐도 김씨 일가의 국가지도자적 자질이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낙후한 지도자적 자질에도 불구하고 위대성을 운운하면서 우상화선전을 위한 기념비건설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김일성시대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상징하는 보천보전투를 기념한다며 양강도 혜산시와 보천군에 기념탑과 기념비, 동상을 세운데 그쳤지만 김정일은 권력세습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혁명전통 계승’을 강조하면서 대대적인 기념비 건설을 북한전역으로 확대하였습니다. 김정일은 권력승계를 위한 혁명전통교양의 극대화를 위해 대형 건축조형상징물들인 대기념비와 기념탑의 형태와 규모, 위치에 있어서 거대함과 역사성을 부각시켜 잘 건립할 데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건설을 당의 혁명전통계승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며 김정일은 1974년 5월에 왕재산혁명전적지 건설장을 찾아와 건설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왕재산 대기념비를 잘 세울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담화를 하였고 1977년 4월에는 삼지연대기념비 형성안을 보면서 간부들에게 ‘삼지연대기념비를 웅장하게 잘 건설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담화를 하였습니다.
이렇듯 김정일은 1963년 9월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에 배치 받은 이후로 줄곧 후계자 승계에서 혁명전통 계승을 강조하여 자기의 권력승계가 당연함을 드러내려고 이런 대기념비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탕진하여 나라의 경제를 더 파괴하였던 것입니다. 양강도 혜산시의 도심 중심에 거대한 대형건축조형물인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건설하도록 하여 1967년 6월 4일에는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이 건설되었고 1971년 5월에는 대홍단에 무산지구전투승리기념탑이, 1972년에는 만수대언덕에 군상과 대기념비, 1975년에는 대성산혁명열사릉과 왕재산대기념비, 1979년 에는 삼지연대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은 새로운 혁명전적지를 발굴하도록 하면서 대형 건축조형상징물건설을 혁명전적지나 혁명사적지에 국한하지 않고 김일성과 김정일과 관련된 장소들에도 건립하여 우상화선전을 더욱 활성화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생일 70돌에 드리는 선물’이라며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김일성경기장, 인민대학습당 건설을 추진하도록 하였고 1982년 4월에 준공하였습니다.
1982년 4월에 김일성의 생일 70돌을 맞으며 평양과 지방의 도소재지들에서 대대적인 정치행사들이 진행되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이런 정치행사들이 새로 건립된 대기념비들에서 진행되어 이전의 혁명전통 상징물들과는 의미와 규모 면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자신이 해온 항일투쟁에 대한 역사적인 발굴이나 고증에 그쳤다면 김정일은 이런 상징물들을 건설하여 항일무장투쟁이 자신의 업적은 아니지만 선대의 혁명업적으로 전통성을 부각하여 유일한 후계자임이 공식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1982년에 이런 대기념비 완공식도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선물하는 형식을 취하도록 하였고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의 언론매체들도 이 대기념비 완공에 대해 ‘당중앙’인 김정일의 공적으로 평가하였던 것입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1960년대와는 다르게 대형건축조형물 건설은 역사적인 공간에 대한 강조보다 오히려 후계자로서 김정일의 능력을 과시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등 평양시 중심에 세워진 이 건축조형물들은 ‘김정일시대에 세워진 대기념비’라는 대명사가 붙으면서 김일성의 ‘혁명전통’을 부각시킨 상징물이면서도 후계자 김정일의 능력, 그리고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는 것임이 강조되었습니다.
대기념비 건축공사에 많은 건설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막대한 국가자금이 탕진 되면서 나라의 경제가 점차 파괴되어갔지만 여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김정일은 권력승계에 업적 쌓기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대기념비건설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건축조형상징물 건설이 특정 장소가 아니라 주민들이 항상 접하고 볼 수 있는 공장과 농장들로 확대되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숙과 관련된 혁명사적비, 현지교시 사적비, 표식비 등이 건설되어 주민들과 인근에 사는 학생들이 새벽마다 충성심을 배양하는 정성관리작업 공간으로 되었고 정치행사들이 진행되는 우상화선전공간으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사망하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글발이 새겨진 영생탑이 전국의 모든 시군들과 연합기업소, 여단급 이상 군부대, 평양시의 곳곳에 세워져 북한주민의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애도공간으로 되었습니다.
김정일의 후계 세습의 과정에서 건축조형상징물 건설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잘 아는 김정은도 자신에 대한 우상화선전을 위한 기념비건설을 하나하나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4년 조선중앙년감에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혁명사적비 <희천발전소와 더불어 길이 전할 불멸의 업적이여, 완공>이라는 제목으로 희천발전소에 세워진 사적비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2009년 3월에 건설장을 찾은 김정일이 희천발전소건설을 2012년까지 끝낼 데 대한 과업을 지시하였고 그가 사망하고 김정은이 인민군 군인건설자들이 발전소건설을 성과적으로 끝내도록 지도하였다”며 이를 기념하여 ‘사적’으로 남긴다는 내용입니다.
2008년에 중풍으로 자기의 몸상태가 나빠지자 김정일은 후계자를 내세워야 되겠다고 생각하였고 2009년부터 여러 현지지도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김정은이 북한주민들에게 후계자로 공개된 2010년 이후부터 2011년 12월 17일 사망하기 전까지 김정은을 데리고 여러 곳을 현지시찰을 하였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의 지시로 함께 현지시찰을 하였던 2.8비날론련합기업소, 평양양말공장 등 여러 곳들에 혁명사적표식비와 현지지도표식비, 현지지도 사적비가 세워졌습니다.
김정일시대에 그가 현지지도를 한 북한의 모든 공장, 기업소, 군부대들이 혁명사적지로 불려지면서 혁명사적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양체육관을 비롯하여 김정은도 그가 현지지도를 한 모든 곳을 사적비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앞으로 김정은이 다니는 모든 곳들에 기념비들이 세워지게 될 것이고 여기에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과 이를 관리하기 위해 드는 노력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매일 출근하여 일하게 될 유급관리일꾼들과 안전을 담당한 보위원과 보안원들, 보수공사에 들게 될 막대한 돈은 우리 인민들이 힘들게 번 돈으로 충당될 것입니다. 김정은은 가장 가난한 지도자로서 인민생활을 발전시킬 생각 대신 이런 상징물건설에만 올인한다면 차례질 것은 응당한 징벌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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