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1950년대 전후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이 공산적화를 위해 일으킨 6․25남침전쟁으로 13만여 명의 한국군과 52만여 명의 북한인민군이 사망하였고 부상자까지 합하면 약 391만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나라가 잿더미가 되었고 기아와 병마로 전후에도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김일성은 대남전략에 따른 도발을 끊임없이 강행하였습니다.
전쟁 후 1954년부터 1959년 12월까지 김일성은 지상도발 32건, 해상도발 19건, 공중도발 1건 이렇게 총 62건의 대남도발을 강행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전후복구건설과 1956년 종파사건 등으로 내부 체제에 당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 조건에서 대남정책에서도 평화선전 공세를 취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56년 4월 23일에 소집한 조선노동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평화통일선언문’을 발표하였고 5월 31일에는 남북한 병력축소를 제안했습니다. 조선인민군을 8만 명으로 줄일 테니 대한민국 국군도 병력을 감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1958년에는 남북한에 잔존하는 중국군과 소련군, 미군 등 모든 외국군대의 동시철수를 주장했으며 중립국 감시 하의 총선거를 진행하자고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평화선전 공세는 시간을 벌어서 또다시 제2의 남침전쟁을 일으키려는 기만전술에 불과했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1954년부터 정세탐지와 전방지역 군사정찰을 목적으로 지상침투를 통해 간첩들을 남파했고 해상으로도 간첩들을 침투시켰습니다. 북한의 해상도발은 동해보다 서해에서 더 많이 감행되었는데 이 같은 도발의 목적은 납치한 어부들에게 간첩훈련을 주어 대남침투공작에 활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56년을 전후로 하여 남한 내 후방지역에 남아 있던 무장공비인 빨치산들이 대부분 소탕되면서 1957년 하반기부터는 한국 내 동조자 포섭과 지하당 구축, 사회혼란 조성 등을 목적으로 무장간첩들이 남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대남도발사건 중에서 1950년대 있었던 대표적인 간첩사건들에 대해 하나씩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정호 간첩사건은 6.25남침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53년 5월에, 당시 북한의 내무상이었던 방학세로부터 간첩임무를 받고 한국에 침투한 박정호가 4년 반 동안 간첩활동을 하다가 1957년에 검거되어 처형된 사건입니다.
당시 방학세가 박정호에게 내린 지령은 첫째로 서울에 침투하는 즉시 위장 자수하여 정당에 침투할 것, 둘째로 한국의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과 자유당의 유화청, 정현모, 진승국 등 네 사람을 포섭할 것, 셋째로 각종 중요기밀을 탐지하여 보고할 것 등이었습니다.
박정호는 남파된 뒤 합법적인 신분보장을 얻기 위하여 서울지방검찰에 위장자수하고 공작금으로 서울 중구 동자동에 대영목재주식회사를 만들고 사장으로 일하면서 당시 한국의 정치계에서 유명인사로 알려졌던 장건상, 김성숙, 조봉암 등 20여 명의 정치인들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는 북한이 주장하는, 위장평화통일노선에 입각한 정당을 조직하도록 유도하였고 1958년 5월에 실시되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 북한을 추종하는 자들이 많이 당선되게 하여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획득하여 변란을 일으키는 것을 시도하였으나 실체가 드러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1959년 5월 6일에 서울교도소에서 사형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20부작의 전쟁연속영화인 ‘이름없는 영웅’들에서 유림과 순희 등 배우들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1978년에 제 1부 ‘적후에서’로 제작을 시작해 1981년에 제 20부 ‘우리는 잊지 않는다’로 촬영이 완성된 조선예술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에서, 주인공인 유림의 실제인물인 정국은 간첩사건은 1953년 8월에 있었던 실제 간첩사건입니다.
남로당 중앙특수부 소속이었던 정국은은 해방 후 국제통신사와 국방신문, 연합신문, 동양신문 등 언론기관의 사장이나 임원을 지내면서 국가 기밀을 탐지하여 남로당 본부에 보고하는 한편, 언론을 통해 왜곡된 보도로 민심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는 ‘국제신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남로당의 정치노선을 선전해 오다가 ‘국제통신사’로 개명한 후 주로 구소련의 ‘타스통신’만을 수신하는 편향 보도를 해왔고 국내 보도내용도 왜곡된 보도를 일관한다는 이유로 폐간조치 당하였습니다. 그 후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 나온 정국은은 다시 언론계에 잠입해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기관지였던 ‘철군(鐵軍)’의 판권을 인수하여 신문 이름을 ‘국방신문’으로 고쳐 발간하였습니다.
정국은은 신문이 가진 막강한 선동의 힘을 악용해 대한민국 군부 고위장교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미국의 군사원조 상황을 낱낱이 탐지하여 남로당에 보고하였고 한편으로는 ‘태양신문’ 가두판을 발간하여 남로당의 정치노선 선전에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신문’과 ‘태양신문’이 폐간되고 남로당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수사망이 자기에게 쏠리자 일본으로 도피하여 ‘연합뉴스’ 주일특파원이라는 명목을 띠고 합법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정국은이 일본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는 당시 거물간첩이었던 김삼룡의 비서 김형륙으로부터 일본으로 가서 활동할 데 대한 지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음악평론가 박용구와 함께 좌익 교포단체인 조선인연맹의 보호를 받으며 공산당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연합신문’ 주일 특파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주일 미군 및 일본의 고위층과 접촉하면서 얻은 정보를 북한에 보고하고 일본에서 대한민국 경무대(景武臺)에 보내는 기밀문서를 촬영하여 조선인연맹 조국방위대 기관지인 ‘새조선’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정국은은 유엔군 기자클럽에 소속되어 주로 유엔군의 한국 작전에 관한 군사 기밀을 탐지해서 북한에 보고하였고 유엔군의 북진 때는 종군기자 자격으로 평양에까지 종군하기도 하였습니다. 유엔군 사령부는 그의 공산당 활동에 대한 정체를 파악하고 사령부로부터의 추방령을 내렸고 일본 정부도 국외 추방령을 내리자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연합신문’ 편집국장, ‘동양통신’ 편집국장 직위에 올라 간첩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치안국 경무관 대우라는 신분증을 소지하고 한국의 중요 수사기관을 출입하면서 간첩활동을 계속하던 정국은은 정전협정이 된지 1달이 지난 1953년 8월 31일에 국가기밀누설 등 간첩 혐의로 육군특수부대에 체포되어 그해 12월 5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54년 2월 19일에 사형되었습니다.
미 의회조사국이 2003년에 발간한 ‘북한도발연표’에는 북한에서 1954년부터 1992년까지 남파한 무장간첩이 3,693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6.25남침전쟁 이후 첫 어선 납치사건인 ‘대성호 납북사건’은 선원 10명을 해상에서 납치한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어선납북사건은 공해상에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영해 내에까지 접근하여 대한민국의 주민들을 어선과 함께 납치한 사건으로 현재 약 500여 명이 북한으로 납북된 채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1958년 2월 16일에는 대한민국 항공 역사상 처음으로 여객기 ‘창랑호’가 남파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어,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 31명과 승무원 3명이 강제로 평양순안비행장에 착륙했던 사건입니다. 이외에도 1950년대에 일어난 김정제 간첩사건과 박상혁 간첩사건도 김씨왕조의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동족상잔의 역사에 기록된 대남 도발사건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