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조형상징물(3)-조선혁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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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에서 김씨 일가의 우상화선전을 위한 대형건축조형상징물이 가장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 평양시 모란봉구역과 중구역 사이에 있는 만수대 언덕입니다. 광복 전까지만 해도 장대재라고 불리던 만수대 언덕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대형 동상과 함께 군상들과 기념비, 조선혁명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에서 김씨 일가의 세습 권력을 위한 우상화선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만수대 대기념비와 조선혁명박물관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1973년 조선중앙년감에는 북한 당국이 1972년 4월 15일, 김일성의 환갑을 맞으며 만수대 언덕에 대형 동상을 세우고 동상 제막식을 진행한 소식을 기사로 실었습니다. ‘만수대에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혁명의 붉은 수도 평양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안겨오는 만수대의 푸른 언덕 위에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대를 이어 계승하며 영원히 그이를 높이 모시고 그이의 가르침 따라 나아가려는 우리 인민의 불같은 충성의 염원을 담은 대기념비가 수령님의 탄생 예순 돐을 계기로 세워졌다”는 내용으로 만수대 대기념비를 세운 목적을 밝혔습니다. 기사에는 또한 “총 부지면적 24만평방미터의 대기념비의 중심에는 수령님의 동상이 정중히 모셔져 있고 오른편과 왼편에는 반세기에 걸치는 그이의 영광찬란한 혁명역사를 보여주는 조각군상들이 있으며 뒤에는 조선혁명박물관이 있다”며 대기념비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치켜든 김일성의 동상에 대하여 “우리 인민이 나아갈 길을 가리키고 계시는 수령님의 숭고한 형상은 그이의 위대한 주체사상과 영도의 현명성, 높은 덕성과 인민적 품성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1973년 조선중앙년감에는 ‘위대한 주체사상의 전당 조선혁명박물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동상을 앞에 모시고 충성의 만수대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웅대하고 우아한 조선혁명박물관은 1972년 4월 25일 개관하였다”고 밝히면서 “조선혁명박물관은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창시하신 위대한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기 위한 혁명의 대학이며 혁명과 건설의 위대한 무기를 안겨주는 주체의 전당”이라며 박물관 건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일에 처음 세워졌을 당시에 국립중앙해방투쟁기념관으로 불렸던 조선혁명박물관은 규모도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1949년과 1950년에는 몇 차례의 사진전람회를 진행한데 그쳤고 전쟁으로 문을 열 수 없었던 6·25남침전쟁 시기에는 평양시를 비롯하여 평안남도와 개성시 일대에서 이동전시회를 개최하는데 그쳤습니다. 전후 북한 당국은 혁명사적물과 유물, 문건자료들을 새로 발굴하도록 하여 1955년 8월 개관식 당시에는 명칭을 기념관에서 박물관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당시 국립중앙해방투쟁박물관에는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의 역사적 시기를 포괄하는 반일해방투쟁 관련자료 1,800여 점이 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당국은 1959년에 전국적인 ‘혁명역사 자료발굴수집사업’을 진행하도록 하여 1961년 1월에 지금의 김일성광장에 있는 조선역사박물관 자리에 연건평에 약 1만평방미터가 되는 박물관 건물을 새로 건립하였습니다.

지금의 만수대 언덕에 북한 당국이 대기념비라고 일컫는 동상과 군상, 조선혁명박물관이 거대한 규모로 새로 건립하게 된데는 1967년의 ‘갑산파 종파숙청’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7년 박금철을 비롯한 국내파인 갑산파 간부들을 숙청되면서 북한의 당과 국가의 모든 요직에는 김일성과 함께 소련극동군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으로 복무했던 최현, 김일, 임춘추, 오진우, 박성철 등 항일투사들로 채워졌습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제의 대토벌을 피해 소련국경을 넘어가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하였던 김일성파인 이들에게는 혁명전통선전에서 소련파와 중국연안파, 국내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산파숙청으로 북한의 모든 권력을 다 쥐게 된 소련군 88저격여단 출신 김일성파들은 혁명역사를 부풀리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였습니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해 ‘공화국 창립’ 20돌을 맞는 1968년 9월을 계기로 박물관의 사적물들에 대한 전반적인 진열개편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지방에서 사는 주민들은 평양시 견학을 조직적으로 가게 되면 조선혁명박물관을 참관하게 되지만 거의 대다수의 북한주민들은 평양방문을 할 수 없어 조선혁명박물관을 텔레비전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양시에 거주하는 수도시민들은 조직별로 매달, 정기적으로 조선혁명박물관을 참관하게 됩니다.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에 있는 만청산연구원 연구사로 배치 받아 근무하면서 연구원 당위원회에서 조직하는 박물관을 참관을 거의 매달 가곤 하였습니다. 박물관 해설강사들은 100여 개의 진렬실을 다 참관하자면 4km, 10리가 더 넘는다고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시기별로 몇 개의 진렬관들을 나누어 참관하곤 하였는데 지금도 해설강사가 박물관이 건립되던 나날에 대해 얘기해 주던 내용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당시 김일성광장에 있던 국립중앙해방투쟁박물관에는 삼국시기의 우리나라와 고려, 리조시대의 역사적인 전시자료부터 해방 전까지 역사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최현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은 김일성에게 얘기하면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아 투사들끼리 몰래 만수대 언덕에 김일성 동상과 지금의 조선혁명박물관 건설을 추진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지방에 현지지도를 나가거나 평양시 안을 지도하러 나갈 때에도 만수대 언덕에서 진행되는 공사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그 주변을 피해 다니도록 김일성의 책임부관에게 부탁하여 완공되기 전까지 김일성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1972년 4월 김일성의 환갑선물로 만수대 대기념비에 대해 투사들이 이야기해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김일성은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조선혁명박물관이 성냥곽처럼 볼품없고 동상은 성냥곽을 지키는 보초병 같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해설강사의 설명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저택은 지금의 만수대 언덕에서 직선거리로 800m밖에 안되는 거리입니다. 이런 대공사를 하면서 800m의 거리에서 듣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도 의아해서 설명을 들으면서도 해설강사에게 의심스러운 생각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일로 오히려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에 참았습니다.

북한 당국은 지금의 조선역사박물관에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우리 민족의 진화에서 역사변천들에 대한 내용은 남기고 김일성 관련 사적자료들을 모두 새로 건립한 만수대 언덕의 조선혁명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결국 국립중앙해방투쟁박물관에서 조선혁명박물관과 조선역사박물관이 분리된 셈입니다.

김정일은 1972년에 조선혁명박물관을 건립하고 만수대 언덕이 김씨 일가의 우상화와 세뇌선전을 위해 수도시민은 물론 해외동포들과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참관지로 변했습니다. 김일성의 생명안전을 위한다며 이곳에서 1km도 안되는 거리에 있던 김일성의 저택을 지금의 금수산태양궁전으로 옮기기 위한 주석궁전 건설이 시작되어 1977년 김일성의 생일 65돌을 맞으며 완공되었습니다.

김정은은 2015년 2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는 조선혁명박물관을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위대한 혁명력사와 불멸의 혁명업적이 집대성된 대국보관으로 새롭게 꾸릴 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도록 하였고 2017년 3월 30일에 개건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새로 개건된 조선혁명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색조각상입니다. 그러나 김정은은 아무리 김일성과 김정일을 색을 입힌 조각상까지 만들어 조선혁명박물관을 통해 세뇌시키려 해도 공중에 꽉 차서 떠다니는 정보의 홍수는 막을 수 없음을 깨닫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빨리 김씨 일가의 영원한 왕족독재세습을 위해 건립된 조선혁명박물관을 없애서 북한주민들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세뇌선전공간들이 모두 사라질 날을 기대하면서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