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196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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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196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저물어가던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핵폭탄으로 약 24만 명이 사망하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따라서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등 국제열강들로 인해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해방 5년 만에 김일성이 6.25남침전쟁을 일으켜 40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시켰으며 온 강토는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되고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낙동강 이남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이 북한군 점령지역이 되었지만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개입으로 대한민국은 수복되었고 1953년 7월에 정전협정으로 휴전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 북한의 대남도발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1960년대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은 남조선혁명론이었습니다. 당시 북한 노동신문에는 “조국의 통일과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서는 남조선에서의 혁명을 수행하여야 한다’라는 김일성이 말한 발언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김일성은 1950년대 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지배하려던 야망이 실패하자 1960년대에는 제2의 한국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대남도발 수위를 높였습니다. 지상과 해상에서 무장도발이 잦았으며 휴전선에서의 매복공격과 교전 등으로 약 400여 명의 북한군이 전사했고 대한민국 국군 300여 명, 미군 약 4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1960년대에 대한민국에서는 1960년 4월의 4.19혁명과 1961년 5월에 일어난 5·16혁명으로 정치적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냉전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남한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틈타 김일성은 소련 및 중국과 군사조약을 체결하고 광범위한 대남도발을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대남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60년대 초 로동당 산하에 연락부, 문화부, 작전부를 신설하고 대남공작을 당 지도하에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19혁명으로 무질서와 혼란이 조성된 남한사회의 현실을 이용해 위장평화공세를 앞세우고 한쪽으로는 간첩들을 대량으로 남파했고 남한 내 용공세력 강화에 주력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 대남연락부는 남한 내에 지하당을 구축과 동조자 포섭을 위해 남한 출신 월북자들과 남한에 연고가 있는 자들을 공작원으로 대거 발탁해 간첩교육을 해서지상과 해상을 통해 남파하였습니다.

이렇게 침투한 간첩들은 대한민국 국군에 위장 입대하거나 국방부 총무국장 또는 육군 참모차장 등 군 고위급 장교 포섭을 기도하였으며 대학들에 지하조직망을 구축하고 농림지하당, 인민혁명당, 통일혁명당 등과 같은 지하당을 구축, 확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남연락부는 남한 어민들을 납치하여 앞으로 있을 전쟁을 대비해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 수집, 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이남화 교육에 활용하였습니다. 이남화 교육은 북한의 간첩들이 남한에 와서 남한 사투리를 사용하며 남한생활에 빨리 적응시키기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196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대한민국이 일본과 한일협정도 체결하고 베트남에 군대도 파병하면서 점차 박정희 정권이 안정을 찾고 남한 사회가 정상화되기 시작하자 북한 당국은 대남전략노선을 수정하였습니다. 노조 등 반정부 조직의 합법적인 투쟁이 어려워지고 남한 내 용공, 종북세력의 활동이 미비해지자 무장 특수부대를 활용하여 사회를 교란하고 혁명화공작 우선의 급진적인 간접전략을 시도하였습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진행되던 남한 내 빨치산 잔존세력의 활동을 위한 지하망 구축, 동조자 포섭, 접선 위주의 혁명화 공작과 정찰, 습격활동이 1965년 이후로는 침투와 도발 횟수가 늘면서 도발의 폭력성이 증가했습니다.

1968년 한 해 동안에 북한 대남연락부가 감행한 대남도발은 침투 284건, 도발 49건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당시 대남도발의 수위가 높아진 원인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김일성이 당시 미국이 베트남과 전쟁을 치르는 기간이어서 한국이 북한의 도발에 신경을 덜 쓸 수 있다고 판단하고 무장 특수부대를 활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대남정책이 이렇게 무장 국지도발로 도약하게 된 데는 우선 대한민국 국군이 베트남전에 파병하는 것을 막고,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며, 한미갈등을 유도해 미군을 철수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의 노예왕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북한의 국지 무장도발사건으로는 1961년 3월 24일 경기도 파평산 무장도발, 1961년 11월 3일 경상남도 거제도 무장도발, 1963년 7월 30일 경기도 파주 무장도발, 1966년 5월 17일 진주 덕의마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7년 4월 12일 중부전선 교전, 같은 날 강원도 화천군 비무장지대 침투사건, 한 달 뒤인 1967년 4월 22일 서부전선 미군막사 폭파사건 등입니다.

1960년대 북한의 해상 무장도발사건도 빈번하게 감행되었습니다. 1964년 8월 8일 경상남도 남해군 당포리 해상침투사건, 1967년 대한민국 해군 당포함 격침사건, 1967년 5월 27일 연평도 근해 어선포격사건, 1969년 3월 16일 강원도 주문진 해상도발사건, 1969년 6월 9일과 10월 23일 두 번에 걸쳐 감행한 전라남도 흑산도 간첩선 격침사건 등이 1960년대 북한의 해상무장도발 중의 일부입니다.

북한의 대남연락부는 어선과 함께 어민들도 납치하여 북한에 끌고 가는 도발도 강행하였습니다. 1964년 3월 1일 어선 보승2호 납북사건, 1965년 11월 1일 서해 함박도 어민 납북사건, 1966년 1월 22일 어선 길용호 납북사건, 1967년 4월 12일 어선 천대11호 납북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960년대 김일성은 베트남전 이후 한반도를 공산화시켜 ‘제2의 베트남화’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대남연락부에 하달해 적극적인 무장침투 도발사건을 감행했습니다. 미군이 베트남전으로 북한도발에 방관시 할 수 있다고 타산한 김일성은 1966년 이후로는 더 적극적인 대남무장도발을 감행하였고 수백여 명의 북한 무장공비들을 남파하였습니다.

대남연락부는 변화된 대남전략에 따라 1967년에 동해상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해군 함정인 당포함을 격침하였고 평화적인 민간 어선들에 대한 강제납치와 납북도 서슴없이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1월 2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고 남한 사회의 불안과 혼란을 조성해 한반도 공산적화를 실현하려고 청와대 무장기습사건을 강행하였습니다.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의 31명의 무장군인들이 남파하여 서울 도심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으나 검문경찰에 의해 저지당하고 무장충돌로 다 죽고 살아남은 김신조에 의해 김일성의 지시로 남한의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청와대 무장기습사건과 사건 2일 후인 1월 23일 공해상에서 미 해군 푸에블로호를 납치한 사건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