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에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북한 최상의 우상화선전마당이자 상징정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의 설립과 변천과정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양시의 중심에 있는 모란봉의 남쪽기슭에 있던 만수대언덕에 김일성의 환갑을 맞으며 1972년 4월에 김일성의 전신(全身)을 형상한 대형 동상과 조선혁명박물관이 세워지면서 그 주변이 방문객들로 복잡해지자 김정일은 김일성의 신변안전을 위한다며 보통문저택을 지금의 금수산태양궁전이 있는 대성구역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당시 보통문인근의 김일성저택은 만수대언덕에서 불과 직선거리로는 500여m, 만수대거리를 통과하여 시내 도로로 이동하면 1km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1972년 만수대언덕에 김일성 동상과 조선혁명박물관이 설립되고 참관 사업이 조직별로 진행되면서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방문일정에 만수대언덕에 올라가서 동상에 경의를 표하고 조선혁명박물관을 참관하면서 조용하던 저택 주변은 소란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보통문 인근에 있던 저택은 평양시 도심 중심에 있어 천리마거리, 창광거리, 만수대거리, 안상택거리 등 도로소음과 고층건물들이 많아 생활소음도 컸습니다. 대성구역 미산동에 새로 건설하게 된 금수산의사당은 대성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 장수왕이 거주하였던 왕궁인 안학궁이 동쪽으로 3.9km의 거리에 있을 정도로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이곳에 김일성이 사업과 생활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도록 저택과 사무실 겸용 건축물을 짓도록 지시하였고 1973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상의 수준으로 건설할 데 대한 김정일의 지시를 관철하기 위해 북한의 건축자재는 물론 외국의 고급건축자재들이 수입되었고 군인건설자들과 당원돌격대 건설노동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김일성의 생일 65돌이 되는 1977년 4월 15일을 맞으며 공사가 완공되었습니다. 1967년 박금철 부수상을 비롯한 국내파가 숙청되면서 수상제에서 수령제로 바뀌었던 국가영도자에 대한 호칭이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 회의에서 주석제로 변경되고 나서 김일성 주석으로 불리면서 금수산의사당이 건립되고 나서 평양주민들은 ‘주석부’ 혹은 ‘주석궁전’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77년부터 사망한 1994년까지 17년 동안 이곳에서 사업도 하였고 휴식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1994년 7월에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시신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러시아 기술자들을 초청하여 시신영구방부처리를 하도록 하였고 그때부터 금수산의사당은 김일성의 시신보관장소로 바뀌었습니다. 백두혈통과 우상화선전 공간으로 활용하여 자기의 권력승계의 당연성을 과시하려는 그의 계책으로 약 8억 9천만 달러의 막대한 돈이 탕진되었습니다. 건축물의 내외부공사가 더 진척되었고 수만 명의 군인들과 돌격대 건설노동자들이 시신보관소로 바뀌게 될 이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김일성 사망 1주기를 맞으며 1995년 7월에 금수산의사당이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1996년 7월 27일부터 김일성 시신을 일반주민들에게 공개하였고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참관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금수산태양궁전 참관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무기는 물론 그 어떠한 소지품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장소에서 멈춰 서서 시신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도 금수산기념궁전을 참관하면서 유리관 안에 누워 있는 김일성의 시신을 보면서 사람이 죽으면 결국 끝인데 지금까지 충성을 다해서 일했던 허구함에 실망감이 컸던 기억이 납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두 명의 시신이 동시에 안치되었고 2012년 2월 16일 김정일의 생일 70돌을 맞으며 금수산기념궁전은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또다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북한의 외국문출판사에서 2013년에 출판한 도서 ‘주체101(2012)년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에는 “2012년 1월 12일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정치국 특별보도를 통해 금수산기념궁전에 김정일을 생전의 모습으로 안치하고, 2월 16일에는 금수산기념궁전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명명하였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하는 길이 415m, 너비 216m 크기로 조성된 광장에서는 우상화선전을 위한 다양한 정치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2013년 4월 1일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7차 회의에서 ‘금수산태양궁전법’을 채택하였습니다. 총 5장 40조의 관련 조항으로 된 금수산태양궁전법 1장에는 금수산태양궁전의 지위를 주체의 최고 성지로 규정하여 민족존엄의 상징, 민족번영의 만년유산, 민족의 영원한 성지이기 때문에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금수산태양궁전을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2장에는 금수산태양궁전 시설물의 영구보존을 위해 영구보존위원회를 조직하고 시신이 보관된 영생홀의 온도, 습도, 조명, 위생상태 등을 정확히 보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김일성, 김정일과 관련한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증서, 열차, 승용차, 배, 전동차, 사진, 문헌 등은 관련 기관에서 책임지고 보존할 수 있도록 하였고 시신을 경배하는 방법이나 시간 등도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경배를 표시하는 장소는 입상홀, 영생홀과 금수산태양궁전광장에 있는 태양상이라고 규정하였고 북한 주민과 해외동포는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하고 외국인의 경우에는 해당 국가의 예법대로 하도록 방법까지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박제품이나 다름없는 시신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매해 5월과 6월을 방부약물처리기간으로 정하고 이때에는 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되고 나서 17년 동안 금수산태양궁전을 29회 방문하였습니다. 이것은 1년에 한 두 번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김정은은 집권하여 초기 5년 동안에 39회나 방문하였습니다. 1년에 7.8회나 시신을 참배한 셈입니다. 이것은 김정일보다 약 5배나 더 많이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김정은이 김정일보다 더 시신을 많이 찾아온 이유는 후계세습과정이 짧았고 재일본귀국인 출신 무용배우인 첩에 불과한 자기의 생모 고영희에 대해 공개되는 것이 두려운 처지에서 오직 백두혈통을 강조하기에는 이 시신들을 통한 세습의 당연성 강조가 절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북한 당국은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를 극대화하기 위해 ‘금수산기념궁전 전설집’ 출판하여 보급하였습니다. 전설집에는 김일성이 하느님보다 더 위대한 하늘이 낸 위인이라며 김일성이 사망하자 우주도 분노하여 며칠 동안 소낙비를 쏟아부어 슬픔을 표시하였고 지나가는 새들도, 심지어 구름까지도 사망을 못내 아쉬워하였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두 명의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은 북한주민들을 노예화시키는 우상화선전마당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70돌 생일인 2017년 2월 16일을 맞으며 진행된 경축행사가 궁전 광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육해공군 장병들의 열병식과 충성의 결의모임에서 당시 총정치국장이었던 황병서는 “주체혁명위업의 최후 승리를 기어이 성취하겠다는 것을 태양민족의 최고 성지 금수산태양궁전에서 다시 한 번 굳게 맹세합니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이렇듯 금수산태양궁전은 김정은이 자기 자손들도 영원히 노예왕족국가의 주군으로 군림하는 인간지옥을 만들기 위한 건축조형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