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1·21 청와대 기습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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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시간에 1960년대 북한이 남한을 대상으로 감행한 무장대남도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남한 내 지하활동에서 무장국지도발로 대남정책을 바꾼 북한의 대남연락부는 특수부대들을 남파하여 무장도발을 강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한 해 동안에 북한이 감행한 국지도발건수만 해도 333건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1968년 1월 21일,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 대남연락부와 인민국 정찰국이 감행했던 ‘1·21 청와대 기습사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김일성은 당시 남한 내 대남공작원들의 활동과 대남적화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인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더욱이 1967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이 제7대 재선에 성공하자 박 대통령 암살계획을 직접 대남연락부에 하달하였습니다.

1·21 사태라고도 불리는 청와대 기습사건은 김일성의 지시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124부대 즉 특수부대 무장공작원 31명이 남파됐고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까지 침투하려다가 발각되어 김신조만 생포되고 1명은 도주했으며 29명이 현장에서 사살된 사건입니다.

1968년 1월 16일 밤 황해북도 연산군 제6기지에서 출발한 무장공비들은 1월 17일 밤 11시에 휴전선을 넘어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뒷산, 경기도 양주시 노고산을 거쳐 북한산으로 침투해 1월 21일에 한국군과 교전했으나 무장공작원들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사살된 것입니다. 당시 생포된 김신조가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이 직접 지시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 임무였다는 것을 밝혔고 남한에서는 이 사건을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북한에서는 처음에는 124군부대 무장공비 76명을 남파하기로 계획했습니다. 76명을 5개 조로 나누어 한 개 조는 청와대를 기습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고 나머지 조들은 한국주재 미국대사관을 공격하여 미국인 외교관들을 암살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3개 조는 국방부 육군본부, KBS방송국, 서울 용산구에 있는 서빙고보안사 분실 등을 공격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서빙고보안사 분실은 남파된 간첩들이 감금되어 있던 수감시설로써 북한은 그곳을 중요한 지점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여러 지점을 동시에 공격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인원을 줄여서라도 청와대만 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주요 요직 간부들을 암살하도록 직접 지시하면서 남파 인원은 76명에서 31명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휴전선을 넘어 1월 19일 낮 2시경에 무장공비들은 경기도 파주시 법원면 초리골 야산에서 땔감을 하러 산에 올라온 우씨 4형제와 마주쳤습니다. 당황한 무장공비들은 무전으로 북한에 이 형제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봤으나 북한으로부터 회신된 암호를 풀 수 없어 투표를 통해 살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 주 임무였던 만큼 이 우씨 형제는 나이가 어린 무고한 민간인들인데다가 그들을 죽여 눈 덮인 산야에 시체를 묻는 것이 번거롭다는 이유였습니다.

공작조는 이 나무꾼 형제들에게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북한에서 큰 포상을 받게 해주겠다”며 살려주었고 집으로 내려온 형제들이 저녁식사를 하며 덜덜 떨자 부모들은 사유를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무꾼 부모들은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고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에 이 사실이 통보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신고내용의 신빙성을 재확인하고 이들이 서울로 향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북한산과 서울시에 대비병력을 배치했습니다.

당시 습격암살조가 북한으로부터 받은 회신을 후에 대한민국에서 풀었는데 4글자로 된 무전 회신내용은 ‘원대복귀’였다고 합니다. 분명 나무꾼 4형제를 만났으니 작전이 실패했다고 보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무전수가 암호해독을 못하여 이들은 나무꾼 형제들을 풀어주고 시간당 10km의 빠른 속도로 청와대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30kg의 완전무장을 하고 한 시간에 30 리를 움직인다는 것은 특수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동속도였습니다. 1월 21일 밤 9시 50분경 청와대 서북쪽 30m 지점에 있는 자하문 초소에 당도한 124군부대 무장암살조원들은 이곳을 지키고 있던 종로경찰서 경찰관 2명으로부터 검문을 받게 됩니다. 검문당시 무장공비는 "우리는 CIC 소속 대원들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고 말했지만 경찰들은 이들을 지체시키면서 무전으로 상부에 보고했고 이어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과 경찰병력이 당도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초소 가까이로 서울 시내버스가 접근해왔습니다. 버스 안에는 늦게 퇴근하던 직장인과 한창 사랑에 빠져 연애하던 한 쌍의 젊은 남녀 그리고 집에 있는 여동생에게 맛있는 간식을 사들고 귀가하는 학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시내버스 전조등 불빛이 초소를 환히 비추자 시야가 흐트러진 무장공비들은 이 버스를 군 병력이 타고 오는 전투차량으로 오인하고 암살조장인 김종웅의 ‘작전개시’ 명령에 따라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버스에 탄 채 그 자리에 사망하였고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도 조장 김종웅이 쏜 기관단총 총탄 여러 발을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검문 현장에서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고 후퇴하던 정종수 경찰관도 다른 무장공비가 쏜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생포된 무장공비 김춘식은 치안국으로 압송되어 무장해제를 받던 중 실수로 수류탄 핀이 뽑히면서 폭사했습니다. 뿔뿔이 헤쳐져 국군과 조우하던 29명의 북한인민군 124군부대 전투원들은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국군의 추격을 받던 무장공비 1명이 서울 종로구 인왕산 세검정 계곡에서 국군에 생포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생존자 김신조였습니다. 당시 그의 손에는 자폭용 수류탄이 들려 있었으나 그는 증언을 통해 죽고 싶지 않아 투항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새벽 4시 15분경 김신조는 자기가 무기를 감추어 둔 장소에 대한민국 방첩대 특공대원들을 안내했고 장비들이 회수되었습니다. 당시 자수한 김신조의 당시 나이는 만 26살이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서울침례회신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고 80세가 된 지금에도 건강한 몸으로 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42년 6월 2일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난 김신조는 생포되면서 투항하여 목숨을 견졌지만 20대의 청년들이었던 특수부대 전투원들은 김씨왕조 노예 군대가 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경찰관들과 군인 23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7명도 사망했습니다.

1950년 6․25남침전쟁을 일으켜 391만 명의 사상자를 냈던 김일성과 이어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 김씨왕조 독재무리들의 권력야욕이 부른 대남도발로, 우리 겨레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희생을 당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청취자 여러분들은 잊지 말기 바랍니다. 저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주민들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김씨왕조야 말로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두겁을 쓴 족속임을 명심하길 바라면서 오늘은 여기에서 방송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