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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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라고 불리는 북한 특수부대 남파사건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하여 12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에 소탕되기까지 약 2개월간 게릴라전을 벌인 사건입니다. 여기서 공비라는 말은 ‘공산비적’이라는 말로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북한군을 ‘공산비적’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1950년 6.25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에 의해 39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쟁 후 김일성에 의해 북한 대남연락부가 남파공작원들을 대한민국에 파견하여 입힌 인명피해는 그 규모가 전쟁과 맞먹을 정도라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1968년 10월부터 약 2개월간 남파된 북한 특수부대에 의해 희생된 남북한 군인과 민간인은 150명을 넘었으며 부상자만 해도 30명을 넘습니다. 북한에서 남파된 북한군인 120명 중 113명이 사살되었고 7명이 생포되었으며 죄 없이 무고한 대한민국 국민 40여 명이 사망하고 3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에서 대대적인 유격 활동인 게릴라 활동으로 지하망에 숨어있던 불순세력들을 선동하여 민중봉기를 일으켜 남한을 정복하려고 꾀한 것입니다. 김일성은 무장한 남파간첩들로 무자비한 테러와 파괴활동을 벌려 남한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중국 모택동의 전술을 도입해 전후방을 교란하고 병력 분산과 피로조성, 위조지폐 대량사용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를 혼란시켜 한반도 공산화를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대남연락부는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하여 침투시켰습니다. 남파된 무장공비들의 의복은 군복, 신사복, 등산복 등 다양하였습니다. 1968년 10월 30일에 파견된 1차 공작조는 2개조 30명으로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해안으로 침투했습니다. 2차로 2개조 30명은 11월 1일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으로 침투하였으며, 3차로 4개조 60명이 11월 2일 강원도 삼척 원덕면 월촌리 해안으로 침투하였습니다.

당시 생포된 남파 무장간첩들의 진술에 의해 제2차 침투조 30명은 1968년 7월 9일부터 평양에 위치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 124군부대 1기지에서 3개월간 유격훈련을 받았고 10월 1일부터 한 달 동안은 동해안의 특수훈련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후 10월 30일 원산에서 배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11월 2일에 강행된 3차 침투조는 11월 3일 새벽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고수동 주민이 울진경찰서에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하면서 그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당시 신고한 내용은 이날 아침 무장공비 30여 명이 산간마을인 고수동에 나타나 주민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놓고 북한을 찬양하는 말을 하면서 이에 반항하는 주민들을 칼로 찌르고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고할 경우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주민들을 노동당, 여맹 등에 가입하도록 총검으로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남파간첩들은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고 뒤늦게 도착한 주민은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는 등 처참한 살인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주민들의 신고로 대한민국의 군경〮과 예비군이 즉시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착수하였고 약 2개월간 계속된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여 침투한 120명 모두를 소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신고를 접수한 대한민국 국군은 11월 4일 오후 2시 30분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간첩소탕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을종사태’란 대한민국 대통령 지시(훈령) 제18호에 근거한 것으로 일부 지역에서 무장간첩 행위가 질적양〮적으로 증가해 경찰 병력만으로는 치안 확보가 곤란할 것으로 판단될 때 군 병력을 해당 지역에 상당기간 투입하여 남파무장간첩 소탕작전을 수행하는 작전명입니다. 을종사태가 발령되어 작전에 돌입한 군경〮과 예비군은 남파무장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구축하여 본격적인 소탕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한편 김일성은 196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창건 20주년 기념식에서 “남한 혁명은 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며 이 주권 쟁취 방법은 무력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남파간첩사건의 발단이 김일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전문가들은 1968년 말엽에 들어서면서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고 파리평화협정이 진전되면서 대결의 분위기가 완화되자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군사 원조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다시 한번 부각시키려고 대대적인 남파간첩사건을 감행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남파한 120명의 무장간첩들은 8개조로 분산되어 깊은 야밤을 틈타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고포 해안에 상륙하여 경상북도 울진군과 봉화군, 강원도 삼척군과 명주군(지금의 강릉시의 일부), 정선군 등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서 침투하였습니다. 당시 무장공비들이 상륙한 고포 해안초소 근무인원은 6명이었으나 이날따라 공교롭게도 다른 부대로 전역하는 병장을 축하한다면서 4명이 식당에 술을 마시러 나가고 초소에는 2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남은 2명 중에 1명은 내무실에서 잠을 자고 나머지 1명이 상륙하는 무장공비들을 발견했으나 뒤늦게야 분대장한테 보고를 했고, 그때에야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이미 남파한 무장간첩들이 해안초소를 통과한 이후여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기관단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무장공비들은 침투한 지역의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면서 남로당에 가입하라며 가입신청서를 강압적으로 작성하게 했고, 또 북한의 선전물들을 나누어주면서 소위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사상교육을 실시하여 인민유격대 및 조선로동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으며, 이를 거부하고 도망치려던 주민들을 마구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남파한 무장공비들에 의해 삼척군 하장면의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과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가 무참히 살해당했고 편지나 소포들을 배달하던 우편집배원도 납치된 후 처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남파간첩들은 경북 영주군에선 일가족을 안방에 묶어놓고 외양간의 소를 끌고 가며 장롱 안에 있던 옷들을 걷어가기도 했고 강원도 평창에 침투한 무장간첩들은 일가족을 대검과 돌멩이로 잔혹하게 살해하고 소와 닭을 빼앗았으며 절간을 습격해 승려들을 감금하고 시주받은 현금과 식량을 약탈해 달아나기도 했습니다.

1968년 12월 9일 오후 7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의 한 농가에 침투한 무장공비 5명은 어린 이승복 학생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다고 하여 대검으로 입을 찢어 살해했습니다. 이승복 학생 피살사건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군과 향토예비군은 총공세로 남파 무장간첩 소탕전에 돌입해 1968년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의 간첩소탕작전에서 무장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함으로써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북한군이나 대한민국의 국군과 민간인들은 결국 김일성에 의해 귀중한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