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은 지구상에 국가지도자의 초상화를 가정집이나 공공기관에 거는 유일한 나라일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초상휘장을 달고 다녀야 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저도 처음 대한민국에 와서 항상 가슴에 달고 다니던 초상화를 달지 않으니 얼마 동안은 생소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은 북한 당국이 주민들에게 초상휘장을 달고 다니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초상휘장이 김씨 일가의 우상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68년 김일성의 초상화가 김정일의 지시로 만수대창작사에서 제작되어 배부되기 시작하여 1969년 말에는 북한의 모든 가정과 기관기〮업소, 국가기관 등 그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앙당 선전선동부가 책임지고 진행한 ‘초상화모심사업’이 우상화선전에서 효과를 본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의지대로 생활해야 한다”면서 “그러자면 직장에 나와 있을 때나 퇴근해서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물론 걸어가면서도, 지어 잠자리에 누워서도 오직 김일성의 교시를 어떻게 하면 무조건 관철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1970년 11월에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5차대회를 앞두고 김정일은 중앙당 선전선동부 책임일꾼들에게 만수대창작사에 과업을 주어 모든 북한 주민들이 항상 가슴에 달고 다닐 수 있는 김일성 초상휘장을 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의 중앙년감에도 “1970년 11월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 즈음해 인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반영된 김일성의 존귀한 영상이 모셔진 초상휘장을 제작하여 당대회 대표들에게 수여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결국 1970년대부터는 ‘몸에 달린 초상화’, ‘걸어 다니는 초상화’인 초상휘장이 북한주민들에게 신체의 한 부분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덕성실기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에도 김정일이 김일성의 초상휘장 제작공정을 일일이 요해하고 제작공정을 자동화하며 성능 높은 수지(플라스틱)를 도입할 데 대한 문제, 앞으로 초상휘장 사진을 새로운 인쇄방법으로 할 데 대한 문제, 초상휘장의 형식을 여러 가지로 늘일 데 대한 문제, 그리고 자체의 힘으로 설비를 제작하여 현대적으로 잘 꾸릴 데 대한 문제 등 초상휘장 제작사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방침과 방도들을 환히 밝혀 주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초기 1970년대에 처음 제작된 초상휘장은 플라스틱 수지로 만든 것이었고 크기도 탁구공만한 크기였습니다. 그리고 초상휘장의 색깔이 일치하지 않아 김정일은 여러 차례 이와 관련해서 지적하곤 하였습니다. 초상휘장이 처음 제작된 지 8년이 지난 1978년에도 김정일에게는 마음에 꼭 드는 초상휘장이 제작되지 않아 그해 6월 5일에는 직접 만수대창작사를 현지지도하면서 이에 대해 해당 간부들에게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아직 잘 형상하지 못하고 있다”며 추궁하였습니다. 김정일선집 8권에 있는 노작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형상과 미술작품창작에서 나서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에는 김정일이 “당 제5차대회 때에 처음 형상한 초상휘장은 지내 큽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휘장 영상부문의 색을 통일시켜야 하겠습니다. 지금 모시고 다니는 초상휘장을 보면 영상부문의 색깔이 서로 다릅니다. 어떤 것은 빨갛고 어떤 것은 지내 희며 어떤 것은 노란색이 납니다. 초상인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초상휘장의 배경과 형태는 달라도 영상부문은 색이 다 같아야 합니다”라고 지적한 내용이 그대로 나옵니다.
초기에는 어떤 사람들은 초상휘장을 오른쪽 가슴에 달기도 하였는데 김정일은 초상휘장을 다는 위치도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달도록 할 데 대하여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인 심장처럼 초상휘장을 잘 달고 다니라는 의미였습니다. 지금도 중학교에 다닐 때 초상휘장 수여식을 하였을 때 처음으로 수여받은 초상휘장을 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외부 세계에서 북한에 대해, 초상휘장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보급한 이상한 나라라고 비난하는 줄도 모르고 그때에 김일성 초상휘장을 달고 우쭐대던 제 모습을 생각하니 수치감이 듭니다.
김일성 초상휘장은 1980년 6차당대회를 맞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동으로 제작된 초상휘장은 당깃발 모형에 가운데 원형 안에 김일성을 형상한 초상휘장이었습니다. 이 초상휘장을 당깃발상, 약자로 ‘당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당대회 참가자들에게 수여된 이 초상휘장은 북한에서 권력의 상징으로 되었습니다.
비록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여 초상휘장을 수여 받지 못했지만 평양시와 지방에서 한다하는 간부들이 당상을 달지 못해 안달이 났던 것입니다. 중앙당과 지방의 도당과 시군당 선전선동부에 인맥(안면)을 동원하여 초상휘장을 손에 넣으려고 노력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만수대창작사의 간부들이나 노동자들에게도 당상을 구입하기 위해 접근하였습니다. 무상배부원칙으로 초상휘장이 공급되던 것이 밀매로 판매되었고 뇌물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평양시에서는 초상휘장 도난 사고도 줄을 이었습니다. 당상을 달았던 여성들이 갑자기 덤벼드는 초상휘장 도둑에게 옷까지 찢어지는 일들이 빈번해지자 밤에 혼자 퇴근하는 여성들은 초상휘장을 떼서 가방에 넣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만수대창작사에서는 김정일의 지시로 다양한 모양의 초상휘장을 제작하였고 노동당에서는 이것을 해당한 자들에 한해서 수여하였습니다. 쌍상, 당상, 국기상, 군복상, 전위상, 원형상 등 여러 가지 모양의 초상휘장이 생겨났습니다. 쌍상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함께 있는 초상휘장입니다. 당상은 당 깃발 모형의 초상휘장이라면 국기상은 붉은 남홍색 깃발모형이고 군복상은 장군복을 입은 모습을 형상한 휘장입니다. 간부들만 달던 당상은 점차 확대되어 으스대기 좋아하는 젊은 청년대학생들이나 지방의 하급 간부들마저 달기 시작하였고 재일본귀국동포들만 달도록 규정되었던 국기상도 일반인들이 달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년전위라는 글자가 새겨진 전위상은 청년동맹원들에게 해당되는 초상휘장으로 제작되었지만 일반인은 물론 중학생들도 달았던 것입니다. 초상휘장은 성분사회인 북한의 계급을 갈라보는 징표처럼 되었고 1980년대에 멋진 초상휘장을 달려는 욕구도 점점 더 커갔습니다.
김정일은 자기의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 배지에도 김일성의 초상을 넣도록 지시하였고 길게 가로 드리운 깃발에 김일성의 모습을 형상하고 아래에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종합대학 초상휘장도 등장하였습니다. 다른 대학의 대학생들은 자기 대학의 명칭이 글로만 새겨진 것이어서 초상휘장을 별도로 달고 그 아래에 대학배지를 달았지만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생들은 초상화와 대학명칭이 함께 새겨진 대학배지를 달았습니다. 지금도 대학에 다닐 때 맥줏집이나 선술집 등에 가서는 대학배지를 떼고 술이나 맥주를 마시던 생각이 납니다. 당시 종합대학 인근의 지하 전철역인 삼흥역 앞에 룡북식당이 있었는데 그 옆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들키면 퇴학되는 것이 두려워 초상화가 있는 대학배지를 떼곤하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유학생들이나 외국에 나가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거리를 다닐 때 초상휘장을 떼고 다닌다고 합니다. 외국인들도 초상휘장을 다는 사람들은 북한주민들이 유일하기에 쳐다보기도 하고 속으로 ‘세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봉건국가들처럼 3대세습을 하는 현대판 노예왕족국가’라며 비난하기에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북한만 인터넷도 개방하지 못하는 이유는 북한정권이 이런 사실들을 북한주민들이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현재 인터넷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휘장이 장난거리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상품구매 홈페이지 ‘비드프라이스’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형상화한 당상이 일본돈으로 4천엔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북한당국은 김정은 초상휘장도 북한주민들에게 배부하여 그들을 영원한 김씨의 노예, 눈뜬 소경의 충복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공기를 타고 전파되는 정보의 흐름은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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