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197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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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들에는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에 북한이 일으킨 반민족적인 군사도발행위인 대남도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북한의 대남도발은 무력에 의한 기습도발, 무장간첩 침투, 요인암살, 잠수함 침투, 땅굴작전 등 다양했으며 1960년대 전반기까지는 휴전선과 접한 분계연선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로 군사적 습격과 납치를 감행해 오던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군사적 습격뿐만 아니라 무장간첩을 침투시켜 게릴라전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1월, 31명의 무장공비를 파견해 대한민국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던 청와대 기습도발사건, 1968년 10월부터 12월까지 120명의 특수부대 무장공비들을 파견했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북한 대남도발의 게릴라전 형태로의 변화된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군사전문가들은 “당시 북한의 대남군사도발이 강화된 이유는 김일성이 월남전 형태의 게릴라전을 대한민국에도 적용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달성하려고 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게릴라전에 의한 적화통일전략이 실패하자, 1970년대에는 소규모의 무장간첩을 계속 침투시킴으로써 대한민국 내에서 정치적,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면서 반미감정을 고조시키고 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심리적 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베트남에서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베트남전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던 북베트남이 게릴라전을 전개하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도 오랜 전쟁으로 국내 반전운동이 강화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하자 1974년 전면전을 개시한 북베트남군은 1975년에 남베트남 정부를 붕괴시켜 무력통일을 이룩하게 되죠. 김일성은 이렇게, 직접 남베트남에 파견했던 특수부대 무장인원들로 게릴라전을 통한 적화통일을 실현하려 했던 것입니다.

1970년대 대남도발 사례로는 1971년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사건, 서독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 유성근 가족 납북사건,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사건, 1972년 오대양호 납북사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73년 철원군 비무장지대 총격사건, 1974년 추자도 무장공비 침투사건, 해안경비정 제863호 격침사건,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사건, 1975년 동해 간첩선 격침사건, 해군경비정에 북한 선박 충돌사건, 북한 전투기 백령도 상공 침범사건, 헨더슨 소령사건, 1978년 김영남 납북사건,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고상문 납북사건, 미조도 무장간첩선 격침사건 등도 1970년대 대표적인 대남도발사건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1970년 6월 5일에 발생한 해군방송선 아이투(I-2)호 피랍사건은 연평도 부근의 공해에서 어선단 보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120톤 급의 해군 방송선이 북한 해군 고속정의 공격을 받아 승무원 20여 명이 대부분 사살당한 후 피랍된 사건입니다. 1970년 6월 5일 낮 1시 40분경 서해안 연평도 서쪽해상에 대한민국 어선단보호를 위해 배치된 해군방송선 아이투(I-2)호가 2배가 더 큰 250톤급의 공격을 받아 20명의 승조원들이 희생된 채, 배와 함께 납북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후에 대한민국 정부대변인은 “연평도 근해에서 북괴가 우리 해군어로지도선을 납북시킨 것은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상습적인 전쟁도발행위로 북괴의 침략근성을 드러낸, 천인공로할 만행”이라고 규탄했고 유엔군측에 군사정전위원회를 소집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사건이 발생한 6월 5일 중무장하고 정찰을 목적으로 해주근해에 침투한 미군간첩선 1척을 나포했다고 발표하자 미 국무성과 국방성은 서해상에서 일어난 한국 해군함정피랍사건에 관해 미국의 개입설을 반박했고 존 킹 국방성대변인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은 개입되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시 희생된 해군들인 정수일 준위, 문석영 소위, 임성우 상사, 김기강 중사 등 20명의 이름이 발표되면서 북한이 공격한 배가 미군의 정찰선박이 아니라 평화적인 어로작업을 하던 어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상근무를 수행하던 대한민국 해군방송선임이 밝혀졌고 전 세계는 자기의 동족을 서슴없이 희생해서라도 적화통일 야망을 실현하려는 김일성을 ‘20세기의 가장 극악한 살인자’라고 비난했습니다.

1970년 6월 22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문 폭파 미수사건도 1970년대 대표적인 북한 대남도발사건입니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에 전쟁 참전 희생자들을 위해 묘소를 만들 것을 지시했고 1953년에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관악산 기슭에 부지가 선정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에 의해 391만 명의 사상자가 났던 6.25남침전쟁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의지로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서울국립현충원과 대전국립현충원에서 전사자들과 독립투사들,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날이면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요 정치인들, 독립유공자 가족,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현충원에서 분향과 헌화 의식을 가집니다. 이것을 노린 김일성은 6.25남침전쟁 20주년을 맞으며 진행될, 1970년 추념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행사참석자들을 사살하려고 특수부대 요원 3명을 파견하였습니다.

남파된 무장공비들은 행사가 있기 3일 전인 6월 22일 새벽에 현충원 정문에 있는 현충문 지붕에 고성능 폭탄을 설치하려고 서울국립현충원에 잠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벽 3시 50분경 설치 도중에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나머지 2명은 도주하였습니다. 긴급출동한 군 수색병력에 의해 4시 30분 경 현충문 근처 정원 잔디밭에서 폭발로 발과 다리가 절단되어 죽은 사체 1구가 발견되었고 주변에선 소음권총과 통신문건, 지도, 현금 등도 발견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사건은 1971년 5월 17일 남포항을 출발한 북한 간첩선이 중국 산동반도 석도만에서 급유를 받고 간첩 성낙오를 전라남도 해남으로 상륙시키고 북상하다가 6월 1일 새벽 4시 40분경 전라남도 앞바다 소흑산도 서남쪽 60마일 해상에서 발견되어 6시 1분경에 완전히 격침된 사건입니다.

1970년대에 김일성에 의해 일어났던 대표적인 대남도발사건들인 1973년 철원군 비무장지대 총격사건, 1974년 추자도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해경 863경비함 격침사건,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휴전선 땅굴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등은 다음시간들에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