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찬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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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에 북한에서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을 칭송하는 소위 ‘불멸의 혁명송가’들이 제작되고 불리워지던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1980년대이후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와 함께 김정일을 우상화한 칭송가요들이 대대적으로 창작보급된 데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풍족하고 자유로운 선진국들에도 위대한 업적을 쌓은 국가지도자에 대해 북한처럼 칭송가요들을 지어 부르는 나라는 볼 수 없습니다. 나라마다 대통령이나 국가수반의 임기를 4년 혹은 5년으로 정하고 매번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더 나은 지도자를 선출하기에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우상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를 이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의 낡은 통치방식이며 독재국가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구소련이나 중국 등 공산국가들에서도 후계자 권력세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권력욕구가 유달랐던 김정일은 권력승계를 위해 북한주민들을 세뇌시키려고 김일성을 칭송하는 송가들을 만들어 내서 부르도록 하였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중앙당 선전선동부를 통해 자기에 대한 찬양가들도 대대적으로 만들어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창작된 김정일 찬양가요들은 공공연하게 ‘충성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조직별로 새로 나오는 노래들을 보급하면서 이 사업의 명칭을 ‘충성의 노래 보급’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정일의 후계세습을 정당화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온 노래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가 가장 초창기에 김정일 찬양가요로 처음 나온 노래입니다.

김정일을 ‘당중앙’으로 부르면서 처음 노래가사들에도 김정일의 이름대신 당중앙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가사들이 창작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노래가 1980년에 창작된 ‘수령님과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하라’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치적인 지도력이나 경제발전을 위한 능력이 부족하여 북한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만든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사수하겠다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던 생각을 하면 수치감과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1981년에는 ‘해와 별 빛나는 나의 조국이여’가 창작되었는데 여기에서 해는 김일성이고 별은 김정일을 의미하였습니다. 당시에 김정일을 광명성이라는 별로 칭하였던 사실을 모르는 북한주민이 없었던 것입니다. 1981년도 조선중앙년감 기록된 “우리 당이 가르친대로 음악에서 시대정신을 훌륭하게 구현한 결과 1980년을 포함하여 지난 기간 위대한 수령님과 영광스러운 당중앙에 대한 송가들과 근로자들의 충성의 감정을 경건하고도 밝고 숭엄하게 형상한 우수한 음악작품들이 전례 없이 많이 창작되었으며 그것이 우리 음악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내용만 보아도 당시 북한 당국이 김정일 찬양가요 창작을 얼마나 중시하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982년 김일성의 생일 70돌, 김정일의 생일 40돌을 맞으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칭송하는 ‘충성의 노래’들이 대대적으로 창작되어 보급되었고 그 이후로 1980년대에는 창작되는 노래가 김정일에 대한 극찬가들이었습니다. ‘수령님을 따라 천만리 당을 따라 천만리’,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 ‘언제나 당중앙 우러러’, ‘당중앙의 불빛’, ‘당을 따라 한마음 변함 없으리’, ‘한마음 당을 받들어가리’, ‘내 삶이 꽃펴난 곳’, ‘영원히 한길을 가리라’, ‘한생을 바쳐가자 다진 그 맹세’ 등의 노래들이 당시 나온 대표적인 김정일 찬양가들입니다. 김정일 찬양가를 창작한 작가들과 작곡가들에 대한 훈장수여와 표창장 증정 등 정치적인 평가들이 안받침되면서 찬양가 창작경쟁이 붐을 이루었고 1980년대 이후로는 김일성에 대한 송가보다 김정일 찬양가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당중앙을 목숨으로 보위하리라’, ‘당중앙 한 구령에 발걸음을 맞추리’, ‘한마음 당중앙을 믿고 따르리’, ‘김정일화’, ‘빛나라 정일봉’, ‘그 품 떠나 못살아’ 등이 그 당시 대표적인 김정일 찬양가요들입니다. 1980년대 중반 이전에 활발한 예술활동을 벌렸던 만수대예술단에 이어 1985년에 보천보전자악단이 신설되면서 이색적인 무대에 김정일찬양가들이 불리워졌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91년 조선중앙년감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일찍이 우리나라 음악의 실태와 세계음악발전의 추세를 깊이 헤아리시고 전자음악을 우리 식으로 발전시킬 데 대한 현명한 방침을 제시하시었고 만수대예술단이 쌓은 풍부한 경험과 성과에 토대하여 특색 있고 권위 있는 보천보전자악단을 꾸리도록 하여 주시고 우리의 전자음악으로 하여금 혁명과 건설에 적극 이바지하는 주체적인 예술로 되도록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시였다”는 내용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는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지도로 김정일 찬양가요들인 ‘그 품 떠나 못살아’, ‘친근한 이름’, ‘빛나라 정일봉’, ‘장군별’, ‘충성의 한마음’, ‘무장으로 받들자 우리의 최고사령관’, ‘친애하는 그이는 우리와 함께’ 등 많은 찬양가요들을 창작하였습니다. 북한에서 당시 생활하면서 한 사람을 위한 찬양가들이 너무도 많이 쏟아져 나와 가사나 곡들이 서로 유사하여 노래제목들을 서로 엇갈리기도 했던 생각이 납니다.

김정일의 생일 50돌이 되는 1992년부터 김정일 찬양가요들은 ‘당중앙’이라는 대명사 대신 김정일 이름을 직접 거론한 가사들이 창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의 아버진 김정일 원수님’ 등 직접 노래 제목에 김정일의 이름이 있는 노래도 창작되었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당신만 있으면 우리는 이긴다’는 노래에는 가사 내용에 김정일의 이름이 있는 찬양가들도 창작되었던 것입니다. 1994년 조선중앙년감에는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노래가사가 실렸고 ‘미래도 희망도 다 맡아주는 민족의 운명인 김정일동지, 세상이 열백번 변해도 인민은 믿는다 김정일동지,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내용의 이 노래는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도 매일 수차례나 방영되면서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의 극치를 불러왔습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일성 영생을 기원하는 노래와 함께 김정일에게 충성한다는 충성가요들도 창작·보급되었습니다. 황진영이 작사, 작곡한 ‘우리는 맹세한다’를 비롯하여 ‘수령님 뜻을 안고 그이께서 오시였다’, ‘우리의 김정일동지’, ‘정일봉의 우뢰소리’, ‘장군님 받들어 군민은 한마음’, ‘오늘의 7련대 되리라’,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하리라’, ‘수령님 오신 길로 장군님 오셨네’, ‘우리는 장군님의 별동대’ 등 수많은 충성가요, 찬양가들이 창작되었습니다.

1997년 김일성 사망 3주기가 끝나자 김정일은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었고 영생불멸의 혁명송가라고 붙여진 ‘김정일 장군의 노래’가 창작되었습니다. 1998년도 조선중앙년감에는 ‘1997년에 창작된 주요 가요작품’으로 ‘김정일 장군의 노래’와 함께 ‘수령님과 장군님은 한분이시네’ 등 29개의 김정일 찬양가들을 소개하였습니다.

1999년에 ‘장군님은 위대한 수호자’, ‘우리 장군님은 강철의 령장’, ‘장군님은 승리의 기치’, ‘총대로 받들리 우리의 강성대국’ 등이 창작되었고 2000년에 들어와서 ‘장군님과 함께라면’, ‘초소에 장군님 오셨네’, ‘우리 장군님의 그리움’, ‘장군님은 병사들과 함께 계시네’, ‘김정일장군님께 영광 드리네’, ‘정일봉은 조선의 고향’, ‘장군님은 전선길’, ‘정일봉에 봄이 왔네’, ‘장군님을 온 겨레가 따르옵니다’, ‘우리의 친근한 동지’, ‘나는야 선군시대 총대처녀’, ‘장군님 선군의 자욱 길이 전하라’, ‘그 위업 빛나라 김정일장군’ 등 많은 노래들이 창작되었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하자 2012년에는 ‘장군님은 태양으로 영생하신다’, ‘그리움은 끝이 없네’, ‘장군님의 야전복’, ‘피눈물의 바다’, ‘선군의 열두달’, ‘장군님의 야전차’, ‘장군님의 마음안고 왔습니다’ 등이 창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개한 노래들 보다 더 많은 김정일 찬양가들이 창작되어 보급되었습니다. 노래 제목만 이야기 하자고 해도 머리가 혼미할 정도인데 이런 한사람을 위한 수많은 노래를 불러야 하는 북한주민들에게는 얼마나 지겹겠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게 됩니다. 고여있는 호수는 썩기 마련이고 흐르는 물은 항상 깨끗합니다. 다음시간에는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의 우상화를 위해 창작, 보급되었던 김정은 찬송가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하고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