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북한대남도발을 응징한 백골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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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1970년대 북한의 도발에 대응해 김일성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백골부대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리라 봅니다. 저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1973년에 휴전선에서 있었던 백골부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와서야 백골부대가 당시 김일성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북한의 대남도발을 강하게 응징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골부대는 육군 5군단 예하, 강원도 철원군 최전방에 위치한 사단으로 해방 후 조선경비대 제3보병여단으로 창설되어 6.25남침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5월에 제3보병사단으로 승격했습니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승인을 받고 군사무기와 지원 병력을 약속 받아 일으킨 동족상잔의 6.25남침전쟁 당시에는 사자부대로도 불리다가 전후 북한의 대남도발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면서 그 용맹성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백골부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1973년 3월 7일 오후 2시 15분, 강원도 철원일대의 비무장지대에서 군사분계선 표지판 보수작업을 하던 백골부대인 보병 3사단 1개 소대를 향해 북한 인민군이 기습사격을 가했습니다. 이 사격으로 2명의 국군 장병이 중상을 당하자 당시 백골부대 사단장이었던 박정인 준장이 북측에 즉각 사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남한은 대응사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105㎜와 155㎜ 곡사포가 북한군의 진지를 향해 불을 뿜었고 부상병들을 구출하기 위한 연막탄이 작렬하면서 곳곳에 매설되었던 지뢰가 폭발하여 전쟁터를 방불케 하자, 먼저 도발을 걸었던 북한군은 혼비백산하여 피해 달아났습니다.

박정인 장군은 백골사단의 모든 군용차들을 휴전선 남방한계선으로 돌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당시 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71포병 대대장 한명희 중령은 즉각적인 발포명령을 내렸고 74발의 포탄이 사격도발을 했던 북한군 진지로 날았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2년이 지나서 1975년에 월남한, 당시 강원도 김화군 전방 인민군 출신 유대윤 씨는 “백골부대의 포사격으로 북한군 진지에 있던 29명 전원이 모두 몰살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군의 기습도발에 맞서 적 타격원점을 초토화한 박정인 장군의 응징은 지금도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영웅담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 10월 7일에는 대한민국 국군 육군 12사단 37연대 1대대를 장군의 이름을 붙여 ‘박정인 대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해방 후 김일성은 지주와 자본가, 종교인들을 학대하면서 재산을 무상으로 몰수하였고 반항하면 마구 처형하여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도 잘 아실 거라고 봅니다.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원한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서북청년회’를 결성했고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자 국군에 입대했습니다. 진백골여단으로 불리는 백골사단 18연대는 전쟁 당시 북한 출신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입대해 있었고 북한 공산정권에 원한이 컸던 그들은 전쟁기간에도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그들의 철모에는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고향땅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백골 마크가 붙여있었습니다.

전쟁 당시 북한군 내에서도 "백골부대 놈들은 미국놈들보다 더 악독해서 사람만 보면 죽인다"고 선전하여 남한군을 보면 '백골부대'는 지금 어디쯤에 있냐고 물었고 포로 중에 백골부대원이 있으면 무조건 총살했다고 합니다. 인민군 내 백골부대에 대한 공포증이 얼마나 심했는가는 1950년 11월 22일~24일 함경북도 주을지방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 남한군의 한 병사가 전호에서 벌떡 일어나 "백골부대다!"라고 외치며 적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인민군들이 뿔뿔이 헤쳐서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현재 백골사단은 육군 6보병사단과 함께 강원도 철원과 김화지역의 중부전선에서 휴전선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군부대 행사나 군시설 내부 구조물, 현판 등에 전통적으로 해골을 그려 넣어 백골부대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백골사단, 보병 3사단의 여단과 각 대대들은 각각 백골부대의 용맹성을 상징하는 별명이 붙여져 있습니다. 진백골여단으로 불리는 18보병여단의 1대는 진백골대대, 2대대는 아리랑대대, 3대대는 백혼대대로 불리며 양강도 혜산까지 진격할 의지를 담아 혜산진여단으로 불리는 22보병여단의 1대대는 불사조대대, 2대대는 이한림대대, 3대대는 야성마대대로 불립니다.

백골사단, 보병 3사단의 사단가 가사만 봐도 병사들의 용맹성과 의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돌격 명령 내리면 비호와 같이, 적을 쳐 무찌르는 조국의 방패

백골혼 이어받아 죽음을 겁내지 않고, 조국 통일 선봉에서 싸워 이겼다!

조국 산천 울리는 우리의 함성, 승리의 깃발 들고 전진 또 전진!

오랑캐 무찌르고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화랑의 후예들이 싸워 이겼다!

우리는 백골이 되어도 싸워서 이기는 무적의 정예란다, 우리 3사단!

그리고 다른 국군 부대들에선 경례를 할 때 “충성”이라고 하지만 백골부대는 경례구호가 “백골”입니다. 백골사단도 북한군의 도발이 일어나기 이전인 1972년까지만 해도 “돌격”이었는데 북한의 대남도발을 응징한 이후에 박정인 사단장이 “살아 국가에 충성하고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자”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현재의 경례 구호인 "백골"로 변경하였습니다. 백골부대의 구호는 “살아도 백골(白骨)! 죽어도 백골(白骨)! 필사즉생(必死卽生) 골육지정(骨肉之情)! 백골! 백골! 백골!”입니다.

1973년 북한 인민군 대남도발 당시 백골부대 사단장이었던 박정인 장군은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 중흥리에서 태어나 1943년 3월 함흥중학교에 입학했고 해방 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의 횡포와 공산당의 만행에 분노하여 1946년 3월 23일 함흥반공학생 의거에 가담했다가 체포령이 내리자 월남했습니다.

북한의 고향을 김씨 왕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사명으로 안고 살아온 박정인 장군의 단호한 대남도발 응징 때문에, 북한 인민군들은 백골부대와 박정인 장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산가족 평양방문 시에 한 북한 고위간부가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 사단장은 뭘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백골사단의 상징인 박정인 장군은 2016년 2월 3일에 89세의 일기로 서거하였지만 장남 박홍건 대령과 손자 박선욱 소령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북한 동포들을 김씨 왕조 독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장교로 복무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봉건왕조 독재국가인 김씨 왕조에 의해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나라가 잿더미가 되었고 김정일과 김정은의 대남도발로 여전히 북한의 무고한 주민들이 그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북한정권의 붕괴만이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고 북한주민들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