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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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 대남연락부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박정희 대통령 암살시도를 끊임없이 감행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74년 8월 15일 광복절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입니다. 당시 암살범 문세광이 쏜 총탄은 명중하지 못했으나 옆에 앉았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과연 문세광은 어떤 인물이며 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을까요?

문세광은 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석면제조업자인 아버지 문병태와 어머니 육말란 사이에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고등학교 시절엔 ‘한청’이라는 청년단체에서 동맹휴학 등 학생운동에 참가하더니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일본 내 공산주의 청년조직인 프롤레타리아 전국 학생위원회 산하의 ‘폭력혁명 고교생 전선’ 멤버로 활동하면서 점차 극좌 테러활동에 매혹되어 공산서적들을 구입, 독서하면서 좌익사상에 심취되게 되죠. 그가 읽었던 책 중에는 모택동과 김일성의 선집도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은 북한 국적을 가진 조총련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민단계로 나뉘어져 있었고 당시 조총련 이쿠노니시지부 정치부장이었던 김호룡이 문세광과 접촉하면서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에 나서게 됩니다. 1973년 9월에 조총련의 정치일군인 김호룡을 만나고 10월에는 일본인 여자친구인 요시이 미키코의 도움으로 일본인 여권을 마련한 문세광은 11월에는 북한 대남연락부에서 준 공작금 50만 엔을 받고 박 대통령 암살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50만 엔은 약 3,600 달러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문세광은 1974년 2월에 일본인 가와카미 유지라는 가명을 사용해 병원에 입원하여 자신을 은폐하고 있다가 5월에는 오사카에 정박 중이던 북한 여객선 만경봉호에서 사상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세뇌되었고 1974년 7월 17일 밤에 오사카시 주오구 고즈파출소의 창문을 깨고 침입해 권총 2자루와 실탄 5발을 훔쳤습니다. 암살범 문세광은 8월 6일에 휴대형 라디오에 권총을 숨겨 일본을 떠나 대한민국의 김포공항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중구에 있는 조선호텔에서 8월 15일 오전 8시 40분에 실탄을 장전하여 바지 허리춤에 감춘 후, 당시 최고급 승용차였던 미국 포드 20M 택시를 타고 사건현장으로 출발했습니다.

문세광은 자신을 특수한 인물로 보이려고 택시운전사에게 1만 원을 주면서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1만 원은 쌀 1가마니 값을 웃도는 거금이었습니다. 정각 9시 문세광을 태운 승용차는 국립극장 정문에서 검문을 받지 않고 들어가 극장 계단 아래에 도착했고 거금을 받은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리더니 뒷문을 정중하게 열어주었습니다. 175cm의 키에 약간 통통한 몸집, 검은색 외투와 테두리가 검은 안경, 중절모를 쓴 문세광은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현관에서 경호를 서던 대통령 경호원 3명과 경찰관이 8명은 고급승용차를 타고 온, 당당한 자세의 문세광을 일본인 고위인사라고 생각하고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은 채 통과시켰습니다. 8월 15일 경축행사 당시 검사절차가 소홀한 것에 대해 훗날 조사과정에 밝혀진 내용은 5개월 전 3.1절 행사 당시에 외국인에 대한 검문이 심해서 상급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던 것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안전하게 권총을 휴대한 채로 극장 안으로 들어온 문세광은 1층과 2층 로비를 오가면서 저격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극장에 들어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로비에 서 있다가 의심을 받을 것 같아, 문세광은 경호원들이 모여 서있는 곳으로 다가가 일본말로 “우시로쿠 도라오 일본 대사를 기다리는데 혹시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한 경호원이 잘 모르겠다고 하자 암살범 문세광은 “극장 로비는 여기 뿐인가요?”라고 다시 물었고 경호원이 2층에도 있다며 문세광을 2층으로 안내해주자 “아,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었지”라고 하면서 1층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경호원은 상급 경호관에게 “저 분이 일본 대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고 인계받은 경호원은 문세광을 보고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박정희 대통령이 극장에 도착해 로비에 들어서자 경호원은 문세광의 팔을 잡고 기둥 뒤로 데리고 가서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극장에 들어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문세광은 계획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는 로비 근무자에게 다가가서 일본어로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는 그가 승인하는 표정을 지었고 문세광은 로비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출입구 근무자가 그를 제지했습니다. 문세광은 로비 근무자를 가리키면서 일본어로 “저 사람이 들어가도 좋다고 이야기했다”고 둘러대자 역시 일본어를 모르는 출입구 근무자는 무표정인 로비 근무자가 들여보내도 좋다고 하는 줄 알고 출입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광복절 기념행사는 KBS, MBC 등 대한민국의 여러 TV채널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었고 동아방송, 동양방송, 기독교방송 등 라디오 채널에서도 음성생중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6분, 박정희 대통령의 경축사가 낭독되기 시작하고 10분이 지날 무렵에 문세광은 저격을 결심하고 권총을 꺼내려다가 격발을 당겨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하였습니다. 사전에 격발잠금장치를 풀었던 것이 실수로 발사된 것이었습니다. 오발을 하고 놀란 암살범 문세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1층 B석과 C석 사이의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해 뛰어나가면서 2번째 발사를 했으나 총탄은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하던 연탁에 맞았습니다.

2번째 총성이 울리고 나서야 사람들은 암살범 문세광이 아래층 중앙 뒷줄에서 단상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목격했고 “저놈 잡아라!”라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문세광은 총상당한 다리를 끌고 시립교향악단이 자리 잡은 앞자리까지 달려 나갔습니다. 경축사를 낭독하는 박정희 대통령까지의 거리는 10여 미터에 불과했고 문세광은 연속으로 권총 격발기를 당겨 3발을 발사했습니다. 연설을 하다가 놀란 박정희 대통령은 연탁 뒤에 몸을 숨겼고 주석단 앞좌석에 앉아있던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학생 합창단원으로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학생도 총탄에 맞고 사망했습니다.

암살범 문세광은 현장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되었고 체포된 지 불과 5시간 만에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이라고 자백했습니다. 문세광은 대한민국의 법률에 의거해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출입국관리법 위반’,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 등의 혐의가 적용되었고 대법원 확정판결로 사형이 선고된 지 3일 만인 1974년 12월 20일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사형수에 대한 관례대로 구치소 소장이 “최후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라고 물었고 이 말이 일본어로 통역되는 순간 문세광은 창백해진 얼굴로 의자에서 반쯤 일어서며 통역에게 일본말로 공포에 질려 되물었다고 합니다. “그 말뜻은 지금부터 사형을 집행한다는 겁니까? 나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요. 박 대통령께 정말 몹쓸 짓을 했어요. 육영수 여사와 죽은 학생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듯 북한 대남연락부의 살인적인 대남도발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