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응우로 시작된 가계우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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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비난하는 이유는 증명할만한 사람들이 이미 다 사망한 1992년 4월에 김일성의 출생 80돌을 맞으며 출간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기와 더불어 1권 1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에서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의 셔먼호 격침사건에 대한 내용도 당시 화공전술의 창안자였던 박춘권 대신 김응우를 주역으로 날조한 자서전이라는 것이 명명백백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언급된 셔먼호사건과 당시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의 집안형편 등을 통해 현대판 김씨 일가의 가계우상화에 대한 진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75년 전인 1848년에 태어난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의 본관은 전주입니다.

지금 평양의 중심부에 속하는 중구역 중성동은 당시 논농사를 하던 곳이었는데 김응우의 아버지 김송령이 1862년에 평양의 대지주였던 이평택의 묘지를 돌봐주기로 하고 산당집이었던 만경대 초가집에서 살게 되면서 김응우도 14살부터 그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북한에서 김일성이 강행했던 갑산파, 일명 국내파 종파숙청에 대해서는 역사시간에 들어봐서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부수상이었던 박금철을 비롯한 반대파들을 제거한 김일성은 1968년 이후에 이미 출간되었던 역사도서들을 모두 회수하고 본격적인 역사왜곡을 시작하였습니다.

1970년대부터 출판된 북한 역사도서들에는 셔먼호사건과 관련해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의 활약에 대해 날조되기 시작하였지만 이전 도서들에서는 김응우의 이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49년에 북한에서 출간된 도서 ‘해방투쟁사’에도, 1958년과 1961년에 출간된 역사도서들에도 당시 셔먼호 화공전술을 진두에서 지휘했던 박춘권과 평안도 백성들의 투쟁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72년 김일성의 환갑을 맞으며 만수대 언덕에 세워진 조선혁명박물관 1호실 벽면에 대형그림으로 걸려 있는 셔먼호 격침투쟁에서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가 지휘하는 모습도 사진이 아닌 날조된 미술작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조선혁명박물관 1호실에 1894년의 전봉준에 의한 동학농민봉기와 1907년에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던 항일의병투쟁에 대한 그림들이 셔먼호 그림에 이어서 배치된 것은 근대 우리민족 반일투쟁역사의 뿌리가 마치 김응우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날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에서는 “성안사람들은 관군과 함께 나무단을 가득 실은 매생이 여러 척을 연결시켜 불을 지르고 (중략) 해적들을 모조리 수장해버리였는데 증조할아버지도 여기서 한몫 단단히 하였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자료들에는 미국 상선이었던 셔먼호가 무역을 목적으로 중국 천진에 입항하였다가 조선과도 교역할 목적으로 남포항을 거쳐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으로 가던 중에 평양감사 박규수와 박춘권의 지휘로 맞선 평양 주민들의 화선화공전술에 의해 불타게 되었고 배에 탔던 선원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셔먼호에 대해 북한에서는 미군 함선이라고 하지만 여기에 탔던 선원들의 구성을 보면 평범한 무역선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배에는 선주인 프레스턴과 선장 페이지, 항해사 윌슨 등 미국인 3명과 통역원 토마스, 화물관리인 호가스 등 영국인 2명, 그 외에는 19명의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도합 24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선들에는 해적선이나 강도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포와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근현대사를 ‘민족해방투쟁사’라고 부르는데 그 내용은 김일성의 증조부로부터 김일성에 이르는 김씨 일가의 날조된 역사기록으로 이미 큰 줄거리는 북한 해방투쟁사들에서 나왔던 것들이며, 그 허황함은 과학적으로 점점 더 밝혀지고 있습니다.

세기와 더불어의 대부분 내용이 1949년과 1958년의 ‘조선민족해방투쟁사’, 1961년의 ‘조선근대혁명운동사’, 1968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1980년의 ‘조선전사’, 1982년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혁명력사’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전기 등에 이미 서술된 내용들을 나열한 회고록이기에 ‘세기와더불어’는 3인칭 도서들을 1인칭 허구도서로 바꾼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세기와 더불어는 더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마치 내용이 진실인 것처럼 둔갑하였지만 역사전문가들이 평한 것처럼 1%의 사실에 99%의 날조를 기반으로 한 1인칭 소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이 죽기 전에 출간된 1권과 2권의 내용은 800페이지에 달하지만 사실을 반영한 내용은 8페이지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봅니다. 도서 「세기와 더불어는 어떻게 날조되었는가」를 저술한 이명영 교수는 “유능한 소설가가 한껏 윤색한다고 해도 80페이지를 채우기 힘들었을 것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수십여 명의 어용역사가들과 수백 명의 문인들, 영화인들 등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집체적으로 창작된 북한의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화 도서들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날조되고 확장되어 왔으며 더 방대해졌고 이것들이 모여 가짜소설책인 세기와 더불어로 둔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왜 전 세계인들이 마음대로 접속하여 무엇이나 다 볼 수 있는 인터넷을 북한만 차단하고 있는지 여기에서 해답을 찾을 것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민 3만 4천명,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나라에서 살고 있는 수천 명의 탈북민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수만 명의 탈북민들은 북한을 탈출해서 처음 컴퓨터를 접하면서 검색하는 것이 김씨 일가의 왜곡된 역사입니다.

저도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인터넷으로 처음 검색한 단어가 ‘김정일’이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김정일을 치면 나오는 첫 내용이 김정일 출생의 비밀과 그의 여성편력이었습니다. 김일성이 해방되기 전 5년 동안 소련으로 탈출하여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했고 1941년에 태어난 김정일의 이름이 러시아식의 김유라였다는 사실도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첩에 불과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고영희의 차남이라는 사실과 김일성이 죽기 전까지도 사생아인 김정은의 존재를 몰랐고 그래서 김일성과 김정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찍은 사진도 없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인터넷을 폐쇄한 북한이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입니다.

역사를 알아야 민족의 전통을 올바로 계승할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을 김일성민족으로 둔갑하려 하는 현대판 김씨 왕조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날조된 역사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은 정보화 시대에 아무리 인터넷을 폐쇄하여 북한주민들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들려고 하여도 정의와 진리를 갈망하는 그들의 진취성은 막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