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남침용 땅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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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 대남연락부는 1960년대까지는 공중과 지상, 해상으로 대남도발을 강행해 왔지만 1960년대 말 대한민국의 비무장지대 경계용 철책선이 보강되면서 남파간첩들의 지상침투 성공률이 급격히 감소되자 새로운 침투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베트남전쟁에서 월맹군(베트남 인민군)이 사용한 땅굴전술을 따라서 1971년 9월 25일 인민무력부 고위간부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이 비무장지대 지하 관통 명령인 ‘9.25전투 명령’을 직접 하달했습니다. 연설에서 김일성은 “하나의 땅굴이 10개의 핵폭탄보다 더 큰 위력과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며 “땅굴은 요새화된 휴전선을 극복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지시가 하달되자 1972년부터 철저한 비밀에 부쳐져 전 전선에 걸친 남침땅굴 굴착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겉으로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통해 남북한 평화, 화해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처럼 철저히 위장하면서 은밀히 남침땅굴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휴전선 지역에서 지하폭음소리가 계속 감지되어 보고되었지만 대한민국의 국군은 이것이 북한의 남침용 땅굴 굴착으로 생긴 소리인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군이 땅굴 굴설을 시작한지 3년이 되어오던 1974년 9월에 전 노동당 연락부 소속의 땅굴측량기사였던 김부성 씨가 월남하여 귀순해 와서 남침용 땅굴의 존재를 폭로하고 나서야 대한민국 국군은 간간히 감지되던 폭음소리의 원인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비무장지대 내 수색정찰 활동을 강화하였고 1974년 11월 15일에는 서부전선 고랑포 지역에서 북한군이 굴설한 제1땅굴을 발견하였습니다. 11월 중순이 되면서 기온이 내려가자 땅굴에서 새어나온 공기가 수증기로 변해서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탐색대는 이상 징후로 판단하고 굴토한 결과 북한군이 굴착한 남침용 땅굴의 물적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정부는 남침을 노리고 땅굴을 판 북한의 대남도발에 항의하였고 북한은 아니라고 발뺌을 했습니다. 김일성까지 나서서 발견된 남침용 땅굴이 대한민국 국군이 굴착한 것이라며 우겼던 것이죠. 그러나 1975년 3월에 또 다른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민경부대 유대균 소위까지도 본인이 남침용 땅굴 굴설작업에 참가했던 사실을 밝히면서 북한군의 남침용 땅굴 굴착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김화군 일대에서 군 장교로 복무했던 유대윤 소위는 “소대장으로 복무할 때 남침용 땅굴 공사현장까지 군단장 등 북한군 지휘관들을 직접 안내한 일도 있다”고 증언했던 것입니다.

제1땅굴을 발견하고 대한민국 수색대는 땅굴확인을 위해 흙을 팠고 이를 발견한 북한군이 약 3분 동안 300여 발의 기관총 사격을 했습니다. 땅굴이 발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군이 사격한 총탄에 대한민국 국군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 동북쪽 8㎞ 지점으로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약 1.2㎞ 지점에 위치한 제1땅굴의 전모가 드러났고 폭 1m, 높이 1.2m의 조립식 콘크리트 벽과 콘크리트 슬래브 천장으로 이루어진 땅굴 내부도 공개되었습니다. 발견된 곳의 땅굴은 깊이가 2.5∼4.5m로 얕았고 전선줄에 연결된 전등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길이가 3.5km의 땅굴 안에는 레일이 깔려 있었고 궤도차도 놓여 있었습니다. 땅굴에는 우회통로와 궤도차를 돌리는 지점 및 취침장소와 배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유사시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을 통과시킬 수 있고 궤도차를 이용할 경우 포신(砲身)과 중화기 운반도 가능하였습니다.

제1땅굴이 발견된 지 5일 후인 11월 20일 한미 공동조사반이 수색에 나섰다가 북한 인민군이 매설한 폭발물에 의하여 국군장교 1명과 미군장교 1명이 순직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참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800m 지점의 지하폭음 진동파를 감지하고 시추작업을 하여 1975년 1월 26일 제2땅굴을 적중하였고 땅굴확인을 위한 역갱도를 굴착하여 제1땅굴이 발견된 지 4개월이 지난 1975년 3월 19일 강원도 철원군 동북쪽 13km 지점에서 제2땅굴을 발견하였습니다.

제2땅굴은 조사한 결과 폭 2.1m, 높이 2m, 전체 길이 3.5㎞로써 군사분계선 남쪽 1.1㎞지점까지 굴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깊이는 지표에서 50m∼160m이었으며, 남방한계선 남쪽에 여러 개의 출구가 있어 유사시에 한꺼번에 북한군이 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제2땅굴만으로도 유사시 시간당 최대 2만 4천여 명의 병력이 통과할 수 있었고 이것은 시간당 1개 사단 이상의 정규군을 후방으로 침투시켜 전방부대를 일거에 고립시키고 전선을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대남공작원의 침투는 물론 후방교란을 위한 경보병 1개 여단 병력을 은밀하게 후방으로 침투시킬 수 있었고 야포와 차량의 통과는 물론, 땅굴의 마무리 공사가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전차의 침투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제2땅굴 발굴 과정에서도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8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제3땅굴은 1974년 귀순한 김부성 씨의 땅굴공사 첩보 제보를 근거로 1975년부터 경기도 파주시 문산지역에서 시추작업을 하였으나 땅굴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다가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에서 4㎞,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에서 한 시추공에 박혀 있던 PVC파이프가 튀어나오고 지하수가 공중으로 12m 가량 솟아오르면서 발견되었습니다.

땅굴이 발견된 지점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지원하는 유엔군 전진기지로부터 2㎞ 떨어진 곳으로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 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제3땅굴은 북한 지역의 입구에서부터 지하평균 73m의 암석층을 굴착하여 1,635m가량 남쪽으로 뻗어있었습니다. 제3땅굴의 크기는 폭 2m, 높이 2m로 제2땅굴과 같은 구조인 아치형이었으며 전술능력은 1시간에 야포 등 중화기를 휴대한 3만 명의 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제3땅굴 발견 이후 대한민국 국군은 새로 개발된 탐사장비와 기술로 미군과 합동하여 탐색작업을 추진하였고 1989년 12월 24일 01시 24분 북한이 판 땅굴에 적중하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면서 역갱도 공사를 진행하였고 1990년 3월 3일 북한 땅굴로부터 관통 3m 전까지 진출한 상태에서 생생한 관통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내외신기자 대한민국 국군은 40여 명을 현장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북한이 판 제4땅굴도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양구군 북동쪽 26㎞지점에서 발견된 제4땅굴은 폭 1.7m, 높이 1.7m, 지하 145m 깊이에 길이는 약 2㎞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최초로 발견된 제4땅굴의 존재로 하여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용 땅굴을 굴착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남도발에서 북한이 굴착한 땅굴은 유사시에 대량병력의 신속한 이동으로 중요 전략지역을 점령하고 사회혼란이나 무장폭동이 일어났을 경우 게릴라부대인 ‘특수8군단’과 ‘경보병부대’를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데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인공지구위성과 탐사기술수준이 세계적으로 최상인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북한의 땅굴작전은 많은 인적, 물적 피해만 남긴 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