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해방 후 근 80년에 걸치는 남북 분단의 역사는 북한의 대남도발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산업이 막 발전의 시동을 걸던 1970년대, 남북한 경제 격차는 반전됩니다. 197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543달러로 북한의 515달러를 처음으로 앞지르며 김일성의 불안은 커졌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한의 정치, 경제적 발전과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반면 북한은 상대적 열세에 놓이자 이에 대한 불안감을 만회하고 남한의 발전에 제동을 걸기 위해 북한은 국제적인 테러를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를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화 시대라고 부릅니다. 18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국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대통령이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1980년 5월 당시 광주 폭동이라고 불린 5.18 민주 항쟁과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고 남한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회 변혁이 시작됩니다. 북한은 이러한 남한의 정치적 격변기를 한반도의 적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특대형 대남 도발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발의 중심에는 김정일이 있습니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면서 대남공작을 더욱 강화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1978년부터 시작된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제2차 7개년 경제계획 목표를 제시했고 추가로 2년의 조정기를 거쳤지만, 경제는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경제적 성장에서 북한을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서 잇달아 유치하면서 국제적 위상이 높아만 갔습니다.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에 비하여 점점 더 몰락해 가는 북한의 현실을 숨길 수 없었고 이런 상황이 남북관계의 주도권 상실로 이어질까 우려해 대한민국을 안으로부터 와해시키기 위한 대남 도발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린 것입니다.
저는 1980년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민주화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대학 입학시험 결과를 기다리면서 북한에서 매일 TV로 방영하던 대한민국의 민주항쟁 영상들을 보곤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저의 눈에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포착됐습니다. 인민학교 때부터 귀에 박히게 들었던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어린이’라던 것과는 달리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들의 옷차림과 신발은 북한과 비교할 수 없는 고급진 것들이었습니다.
꼭 같은 의상이나 신발이 없었고 색상과 모양이 모두 다른, 당시 재일동포들이 입고 신던 옷과 신발처럼 고급한 것이라는 사실에 ‘정말 남조선은 가난한 나라일까?’라는 의심을 갖게 되었고 남한 시가지에 늘어선 고층빌딩들과 거리를 누비며 달리는 승용차들을 보면서 북한의 선전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김정일은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지던 남한을 견제하기 위해 겉으로는 남북대화를 지속적으로 한다는 의미의 대화 공세를 이어갔지만, 대남통전부에 지시하여 도발 주체를 숨길 수 있는 방법의 테러 방안을 모색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테러를 통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은 치안과 국가안보가 불안해 대규모 국제대회나 국제경기들을 할 수 없는 나라임을 인식시키며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들도 불안하게 만들고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킬 목적이었습니다.
1980년대 북한의 대남 국지도발 양상을 보면 비무장지대의 총격 도발은 간헐적으로 지속했으나 무장기습도발 침투는 현저히 감소했고 대신에 테러는 점점 대형화됐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와 인민군 정찰국이 1980년에 감행한 대남도발로는 3월 23일 한강 하류 무장 공비 침투사건, 3월 25일 포항 인근 바다 간첩선 침투사건, 3월 27일 김화지구 무장 공비 침투사건, 6월 21일 격렬비열도 간첩선 격침 사건, 11월 4일 완도군 횡간도 무장 공비 침투사건, 12월 1일 남해군 미조리 간첩선 침투사건 등입니다.
남해군 무장공비 간첩선 침투사건은 1980년 12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 목도로 북한의 간첩선이 침투해 교전을 벌인 사건입니다. 당일 밤 10시 20분, 남한 군은 남해군 목도 남방 7km 지점에서 은밀히 접근하는 괴선박을 포착해 지속적인 추적을 펼치고 인근 해안에 매복조를 배치해 수중추진기를 타고 해안으로 침투하는 북한군 무장 공비와 교전을 벌입니다.
첫 교전에서 무장 공비 2명이 사살되었고, 다음날인 12월 2일에는 간첩선을 해상에서 격침했습니다. 살아남은 무장 간첩들은 도주하였지만 4일 후 경상북도 상주시 천하저수지 인근 바위틈에 은신 중이던 잔당을 탐색, 격멸함으로써 남해 대간첩작전은 마무리됐죠. 북한 무장 간첩 9명이 사살되었고 간첩선 1척, 수중추진기가 노획되었으며 3명의 대한민국 군인도 희생되었습니다.
1981년 북한의 대남도발은 6월 29일 필승교 무장 공비 침투사건, 8월 26일 SR-71 정찰기 피격 사건을 들 수 있으며 1982년에는 5월 15일 저진해안 무장 공비 침투사건, 1983년에는 6월 19일 임월교 무장 공비 침투사건, 8월 4일 월성해안 무장 공비 침투사건, 8월 13일 독도 근해 간첩선 격침 사건, 10월 9일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2월 3일 다대포 침투 무장 공비 매복 생포 작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는 버마를 방문한 대한민국 서석준 부총리, 정부 요인들과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 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테러였으나 현장에 늦게 도착해 화를 면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는 모든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였고 북한 테러범 2명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시간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북한 대남통전부는 1985년 10월 19에는 청사포 간첩선 격침 사건, 1986년 9월 14일에는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1987년 11월 29일에는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특대형 테러를 감행하였습니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리는 올림픽경기 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감행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1분 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858편을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해 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한 테러 사건입니다.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과 KAL858 여객기 폭파사건은 북한 대남통전부가 테러 도발을 감행하면서 그 범위를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제3국에서 실행해 테러의 주체를 알지 못하게 위장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