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일성 회고록에 나오지 않는 강반석의 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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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1%의 사실에 99%의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이라는 것은 소위 ‘혁명적 가정’이라고 하는 김씨 일가에 대한 내용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방송에 앞서 청취자 여러분들께 드릴 말씀은 종이 위에 틀리게 쓴 글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지만 잘못 쓴 역사는 지울 수 없기에,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지금을 사는 우리가 후대들에게 넘겨줄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김형직과 조선국민회의 진실에 이어 회고록에서 숨기고 있는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의 재혼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기와 더불어 2권 6장 2절 제목이 ‘마지막 모습’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강반석에 대한 언급을 길게 늘어놓았지만 1926년 김형직이 죽은 후 재혼한 사실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습니다.

강반석은 1892년 5월 7일 지금의 평양시 만경대 구역,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지냈던 아버지 강돈욱, 어머니 위돈신의 2남 1녀 중 외딸로 태어났습니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은 당시의 하리교회 즉 지금의 칠골교회 장로였으며 외종조부인 강량욱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평양 교정교회 담임목사였습니다.

이 같은 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난 강반석의 본명은 강신희였으나 당시 미국인 선교사 넬슨 벨이 성경에서 나오는 ‘베드로’에서 따온 반석이라는 이름을 세례명으로 달아주어 결국 강반석으로 개명하게 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강반석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2012년 강반석 탄생 120돌’을 맞으며 우표에도 나왔듯이 ‘강인하고 억센 혁명가의 아내’라는 생각을 하실 것이라고 봅니다.

미술작품 ‘일제경찰에게 항거하시는 강반석 어머님’을 보면 가택수색을 하기 위해 들이닥친 일제경찰들에게 옷가지들을 집어서 찢으며 항거하는 강반석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린 김일성을 형상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반석은 김형직과 결혼하여 아들 셋을 키우면서 어려운 살림으로 고생만 하다가 병으로 사망한, 평범한 당시 조선여성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1892년생인 강반석이 1911년, 19살에 미국 선교사 넬슨 벨의 중매로 17살인 김형직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장남인 김일성을 낳았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지주집 묘지기 집안이었던 김형직을 만나 아들 셋을 키우고, 남편인 김형직이 32살 되기 1달 앞둔 1926년 6월 5일에 병으로 사망하자 과부가 된 강반석의 인생은 어찌 보면 너무도 기구한 삶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아들 세 남매를 키우던 강반석의 피곤한 삶에 대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예배당에 기도를 드리다가도 피곤에 못 이겨 졸곤 하였다. 그러다가도 목사가 뭐라고 한 후 모두가 아멘하고 일어날 때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아멘 소리가 난 뒤에도 잠에 몰려 깨어나지 못하면 내가 슬그머니 흔들어서 어머니에게 기도가 끝났다는 것을 알려드리곤 했다”는 것이 회고록 내용입니다.

강반석은 1926년 김형직이 병으로 죽자 더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김형직이 죽은 해에 김성주가 본명이었던 김일성의 나이는 18살, 김철주는 14살, 김영주는 9살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에서 김형직이 중강에 이어 중국 팔도구에서도 의원을 차리고 환자들을 치료했다는 내용을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김일성은 “중강에서 아버지가 로경두라는 사람의 알선으로 셋집을 얻어 순천의원이라는 방 한 칸짜리 작은 의원을 차려놓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에는 김형직의 생명의 은인인 오동진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김형직이 오동진의 도움으로 의원을 차린 내용은 숨기고 있습니다.

회고록에는 “방 안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도 하나 걸어놓았다. 아마 평양을 떠나기 전에 어느 친구에게 부탁하여 얻어온 졸업증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지만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실은 ‘김일성 평전’에는 약재상인 오동진의 도움이 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짜 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걸어 놓은 김형직은 당시 만주지역에 만연했던 아편으로 처방을 하던 가짜 의사에 불과했고 결국 아편중독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김형직을 알고 있던 목격자들의 증언이었으며 이 내용은 인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 세계가 인터넷에 접속하여 모든 자료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21세기에 여전히 북한만 인터넷을 폐쇄한 이유에 대해 청취자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형직은 조선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와 자신의 마약 욕구로 1924년 겨울, 아편 두 근을 가지고 팔도구에서 양강도 후창군 포평으로 나오다가 국경세관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호송 도중에 탈출하여 일제 군경의 추격을 받는 과정에 입은 동상의 어혈로 병세가 깊어져 사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형직이 사망하기 전에 만경대에서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이 중국 안도로 이동해 아들 간호를 했고 김일성은 그 당시 집안에 들어오면 앓는 아버지에 두 동생까지 있던 상황이 너무도 답답하여, 만주지방에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 소속의 청년조직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은다면서 지주들을 습격하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형직이 죽자 세 아들을 먹여 살리기 어려운 강반석은 김철주와 김영주를 시어머니 이보익에게 맡기고 소사하 인근 ‘만보’라는 중국인 동네에 사는 조선인 조광준이란 부농과 재혼하였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어머니 강반석이 ‘적’이라고 부르던 가슴앓이를 했다며 위암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한다고 했는데, 결국 강반석은 자기보다 나이가 거의 20년 이상이나 많았던 조광준에게 재혼 6개월 만에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조광준은 당시 그래도 무밥에 시래깃국을 먹고 사는 정도로 자기 땅도 조금 있었고 남의 땅도 소작을 맡아서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돈을 저축하여 해방이 되던 1945년에 많은 땅을 사들였지만 지주로 몰려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 훗날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졌습니다.

강반석의 재가는 시어머니인 이보익도 승낙한 것이었지만 김일성은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불만으로 집에 자주 오지 않았고 가끔 안도 소사하 집에 와서도 어머니에게 계부에 대해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혁명의 어머니, 조선여성의 전형으로 불린 강반석은 지조가 강하고 아들의 혁명 활동을 뒷받침해주며 부녀회활동도 열심히 했던 혁명가로 알려졌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남편이 죽고 재혼한 여성이었으며 결국 지병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한 기구한 운명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역사를 날조하여 강압적인 현대판 김씨 왕조를 대를 이어 계속하려는 김정은의 야망은 정의와 진리를 외면하고 있기에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