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버마 아웅산묘소 폭파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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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198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지금의 미얀마 곧 과거 버마의 수도 양곤에서 있었던 폭탄테러사건인 아웅산묘소 폭파암살사건입니다. 1983년 10월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순방하기 위해 정부 고위 간부들을 거느리고 버마에 갔었죠. 북한 대남통전부는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수도 양군에 있는 아웅산묘소를 폭파장소로 정하고 테러범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아웅산 묘소라는 이름은 버마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인 아웅산의 이름을 붙인, 북한으로 말하면 대성산 주작봉에 있는 항일혁명열사릉과 같은 애국열사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버마를 방문하는 외국사절들은 반드시 이 아웅산묘소에 와서 참배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북한 대남통전부는 이곳을 폭파암살 테러장소로 정했던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아시는 것처럼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남북한 정부가 국제무대에서 더 많은 동맹국들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던 시기였습니다. 1974년에 북한을 추월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으로 정치, 군사적인 면에서도 북한은 남한과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버마는 제3세계 비동맹국가 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북한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경제발전을 위해 대한민국과도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였습니다.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과 대한민국 정부 고위간부 일행은 서울을 떠나 버마의 양곤에 도착했고 공항에서 당시 버마 대통령 우산유의 영접을 받았으며 방문 첫날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회담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다음 날인 10월 9일 오전엔 아웅산묘소 참배행사를 위해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호텔에서 나와 승용차로 이동해 아웅산묘소에 도착했습니다. 선두 차량이 도착하고 8분이 지난 10시 26분경에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를 단 차량들이 버마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묘소에 도착했고 버마주재 대한민국 이계철 대사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이계철 대사는 "곧 대통령 각하가 오실 테니 모두 자리에 정열합시다"라고 말했고 2줄로 줄을 맞춰 서려던 찰나에 폭탄이 터졌습니다.

행사에 참가한 나팔수가 나팔의 상태를 검사하려고 연습 삼아 나팔을 불었는데 북한 테러범들은 이 소리가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여 행사가 시작된 소리인줄 알고 폭탄 발사 스위치를 눌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노린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은 폭탄테러장소에 도착하지 않아 암살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일정이 이날 오전 10시 15분에 버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대통령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 전 대통령을 잠시 접견한 후, 10시 20분에 묘소로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영빈관으로 향하던 승용차가 운행 도중에 고장이 난 것입니다.

버마 외무장관은 지나가는 택시를 겨우 잡아서 영빈관에 도착해 전두환 대통령을 태우고 묘소로 향하였지만 행사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게 되었고 결국 도착하기 전에 폭파테러가 발생한 것이었죠.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었던 북한 테러범들은 전두환 대통령과 같이 이마가 벗겨진 주버마 한국대사 이계철 대사가 도착한 것을 대통령의 도착으로 오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인 함병춘도 대머리였기에 북한 테러범들이 이계철 대사나 함병춘 실장 중 한 명을 전두환 대통령으로 잘못 봤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여기에 버마 나팔수의 실수 연주가 더해져 북한 테러범들이 그 순간에 폭탄테러를 자행해 결국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에 정열하고 서있던 17명의 대한민국 정부 고위 수행원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북한 폭탄테러 희생자들로는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 특명전권대사, 김재익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차관, 김용한 과학기술처차관,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대통령 경호관들인 정태진, 한경희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7명의 버마인들도 희생되어 희생자는 모두 24명이었죠.

북한 테러범은 총 3명이었습니다. 테러범 신기철 상위는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김진수 소좌와 강민철 상위는 체포되었습니다. 버마 형법에는 자국 국가원수 및 우방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할 경우 사형에 처해진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북한 테러범들은 폭탄테러를 마친 후 버마 수도의 양곤강으로 가서 대기 중인 쾌속정을 타고 북한 화물선에 숨어 북한으로 귀환할 계획이었으나 당시 북한 화물선의 양곤항 입항이 거부된 상태여서 배에 승선할 수 없었습니다.

테러범 김진수는 새벽 2시에 홀로 양곤 강을 헤엄치고 있는데 새벽에 수영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지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포위되었고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양곤강의 뱃사공에게 돈을 주고 배를 탔으나 배에 탄 버마인들의 신고로 체포되었습니다. 총격전 끝에 테러범 신기철은 즉사했고 강민철은 도주하려 했으나 얼마 못가서 포위당했습니다. 테러범 강민철도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여기에서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으면 얼마정도 지나서야 터져야 하는데 이들이 휴대한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는 순간에 터져버렸으니 말입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이들이 체포되면 잡히지 말고 그 자리에서 죽도록 특수하게 제작한 수류탄을 휴대하게 한 것입니다. 테러범 김진수와 강민철은 둘 다 목숨은 건졌으나 외팔이가 되었고 김진수는 눈에 파편이 박혀 한쪽 눈이 애꾸눈이 되었습니다. 김진수는 남은 한쪽 눈 시력마저 빛이나 어둠만 간신히 구별할 정도로 손상돼 거의 맹인 상태였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진술을 거부하여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한쪽 팔을 잃은 테러범 강민철은 자신이 북한 대남통전부에서 파견한 테러범임을 인정하였고 이것이 참작되어 사형은 면했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가톨릭교 성도가 되었고 마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도 받았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거역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버마 경찰당국의 수사에 협조하여 테러행위를 자인한 테러범 강민철은 감옥 안에서 생활하면서도 북한의 암살위협에 항상 괴로워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지 25년이 되던 2008년 5월 18일에 중증 간질환으로 옥사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인 2007년에 북한과 버마사이의 외교관계가 수복되어 강민철을 북한으로 송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생겼으나 북한은 자신들이 파견했던 강민철을 자국민이 아니라며 송환을 거부하였고 결국 그는 버마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한갓 써먹을 대로 써먹고 버려진 인생이 된 셈이죠.

1983년 10월 당시 버마도 나라 전체가 뒤집혔습니다. 자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아웅산의 묘소에서 폭탄테러를 감행한 북한에 대한 분노로 북한은 버마와의 외교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북한의 대남도발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반도 영토 내를 벗어나 국제무대에서 더 무자비한 테러행위로 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