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리애국열사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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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성산혁명열사릉과 혜산혁명열사릉을 일명 ‘항일혁명열사릉’이라고도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묻힌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김일성과 함께 반일투쟁을 하였던 소위 ‘항일혁명투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의 대다수는 김일성과 함께 일제토벌을 피해 1940년에 소련으로 도망쳐서 해방 전까지 구소련의 극동군 소속의 88독립저격여단에서 소련군을 복무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로 복무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우리는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묻힌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해방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으로 도망가지 않고 만주벌판에서 일제와 싸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북한정권은 충성경쟁을 통해 간부들에게 특혜를 보장하여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도 일반주민들이 상상할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고 있으며 죽어서도 시신 안치하는 장소를 제공하여 그 자녀들이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에 1986년 10월에 조성된 약 15만 평방m, 평수로는 약 4만 5천여 평 규모인 신미리애국열사릉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평양역에서 북쪽방향으로 서평양역, 서포역을 거쳐 다음역인 산음역까지의 거리는 약 16km입니다. 산음역에서 약 1.7km 북쪽으로 가면 신미리애국열사릉에 가닿을 수 있습니다. 신미리역은 평양돼지공장이라는 가명으로 위장한 지하미사일공장이 위치한 곳이어서 주변에는 인가가 없고 논으로 되어 있으며 신미리애국열사릉으로 가는 길만 900m의 도로가 길게 뻗어 있습니다.

신미리애국열사릉 동쪽으로는 평양시에서 순안공항으로 뻗어있는 도로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있습니다. 평양시내에서 순안공항까지의 거리는 약 28km이며 신미리애국열사릉은 그 중간의 절반거리에 있습니다. 신미리애국열사릉은 형제산구역 신미리의 중심에 있는 야산지대의 남쪽에 남향으로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진입로에 들어서면 애국열사릉의 전경이 한눈에 바라보이며 그 뒤로는 울창한 나무숲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습니다. 900m의 진입로를 거쳐 애국열사릉 묘소로 들어서기 전에 화강암으로 만든 릉대문이 있는데 그 대문의 중간 웃부분에는 ‘애국열사릉’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릉대문은 길이 30m, 너비 20m, 높이 12m의 화강석 건축물입니다.

릉대문에는 무장을 한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으며 이곳부터 애국열사릉 해설사들의 설명이 시작됩니다. 화강석대문을 통과하여 중앙통로를 거쳐 200m를 가다보면 정중앙에 글자가 새겨진 길이 10m, 너비 5m의 암적색 대리석 판이 놓여있습니다. 이 대리석판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 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9월 17일"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대리석판은 화환진정대로도 사용됩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1985년 10월에 착공해 1986년 9월 17일에 개관한 이 애국열사릉에는 현재 881명의 묘소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묘소구획은 크게 3개로 구분되어 있는데 가운데구획과 우측구획, 좌측구획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매 단마다 4개에서 12개의 묘소가 안치된 애국열사릉의 가운데 구획은 세로 4단, 가로 17단의 규모이며 544명의 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우측구획은 세로 2단, 가로 19단으로 165명이, 좌측구획은 세로 2단, 가로 19단으로 우측과 단의 개수는 같으나 묘소수는 172명으로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총 묘소수는 881명입니다. 그리고 좌측과 우측구획의 가장자리에 있는 단들에는 아직도 빈자리가 있어 앞으로도 계속 사망하는 대상들을 안치할 수 있습니다.

2007년에 660개의 묘소가 안치되었던 것이 10년이 지나는 동안에 약 220개의 묘소가 더 증가한 것을 보면 해마다 약 20여 개의 묘소가 안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국열사릉은 대성산혁명열사릉과 달리 반신상대신에 얼굴부위를 그린 돌사진이 비석의 중앙 웃부분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이 돌사진은 검은색 대리석에 작은 바늘 같은 것을 쪼아서 제작하였는데 얼핏 보면 진짜 흑백색사진처럼 보일정도로 정교합니다. 그리고 돌로 만든 것이어서 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6년에 애국열사릉이 처음 개관될 당시에는 비석에 돌사진이 부착되지 않았었지만 1998년 4월에 김정일이 애국열사릉 비석을 천연화강석으로 만들고 여기에 변색되지 않는 돌사진을 제작하여 부착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높이가 1.2m정도인 화강석묘비에는 부착된 돌사진 밑으로 당사자의 이름과 살아 있을 당시의 신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이 순서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신분들을 보면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과 함께 반일투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해방 후 북한에서 고위 간부로 활동한 정치인들과 북한정권수립을 지지하였거나 동조했던 사람들, 독립운동가, 납북되어 북한정권을 위해 헌신한 남한 출신, 비전향 장기수, 체육인, 작가 등 그 부류는 다양합니다.

김일성에 의해 6.25남침전쟁기간에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파가 북한의 고위권력계층에서 축출되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공산당 계열의 연안파와 소련파, 국내파가 숙청되면서 1960년대 후반에는 김일성과 함께 구소련 극동군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으로 복무했던 북한에서 소위 말하는 ‘항일빨치산투사'들이 북한의 모든 정치, 행정, 군부를 장악하였고 북한이 사회전반이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지도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이들은 노화와 질병으로 사망되면서 항일투사들이 자녀들인 혁명2세대가 점차 북한의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70년대 김정일의 후계세습이 가속화되면서 간부사업의 중심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80년대에는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도세력이 등장하여 북한 전반을 틀어쥐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의 지반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를 위해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선물정치’로, 죽은 자들에게는 ‘열사릉정치’가 새롭게 부각되게 되었습니다. 누가 어디에 묻혔는지, 장례식을 국가장으로 하는지, 장례식에 김정일의 화환이 진정되는지 등의 관건은 김정일의 지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후세대 간부들에게는 이것이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것은 북한정권, 다시 말해 김정일이 자기의 선친과 자기집안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여기에서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애국열사릉에 돌사진이 부착되던 시기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던 시기였습니다. 이미 부모나 자녀가 죽으면 후에 사망하는 자녀나 부모들은 시신의 임자가 없어 거리에 방치되던 시기에 김정일은 이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돌사진 비석제작 등을 비롯한 ‘측근 돌보기’에만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지금은 김정은에 의해 북한의 주요도시들에 애국열사릉들이 건축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신미리애국열사릉도 이젠 대성산 혁명열사릉처럼 공간이 없어지고 있어 김정은에게는 또 다른 애국열사릉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정권은 혁명열사릉이나 애국열사릉으로 간부들의 마음을 살 수 있어도 이것으로 2천만 명을 넘는 절대다수의 북한주민들의 욕구는 만족시켜줄 수 없습니다. 지금 북한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이런 묘소를 통한 충성경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시장 활동을 통한 더 행복한 물질생활과 흥취나는 개인취향의 문화생활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이 애국열사릉에 어떤 사람들이 안치되었는지를 더 설명하기로 약속드리면서 오늘은 이만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