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포국제공항 폭탄테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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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 대남연락부에 의해 서울아시안게임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1986년 9월 14일, 서울에 있는 김포국제공항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동과 방화동, 인천광역시 계양구 상계동에 걸쳐 위치한 김포국제공항은 2001년 인천국제공항이 개장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민간공항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여 국제무대에서 국가의 위신이 높아진 가운데 국제적인 체육경기들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나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권력승계의 유일한 후계자로 북한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김정일은 북한에 비하여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더 높아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1986년 9월 14일 오후 3시 12분경에 김포국제공항 국제선 청사(현 국내선 청사) 1층 외곽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에 위치한, 철제 쓰레기통에서 고성능 사제 시한폭탄이 갑자기 폭발하였습니다. 이 폭발로 공항에 가족을 배웅하러 나왔던 일가족 4명과 국제공항관리공단 직원 1명 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사망한 일가족은 김포국제공항에서 미국 LA로 출국하는 어머니 김신해를 배웅하러 나왔던 김봉덕 씨 가족이었습니다. 이 폭탄테러로 김봉덕 본인을 비롯해 부인 옥금숙 씨 등 일가족 4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 일가족 9명도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폭탄의 위력은 수류탄 7개가 동시에 터질 정도로 강했고 10장이 넘는 대형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였습니다. 폭발되는 순간에 천정보수공사를 하던 김포국제공항 직원 유주환 씨의 시신에는 90여 개나 되는 파편이 박혀있었으며 하반신은 폭발로 잘려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사건현장을 조사한 경찰은 현장에서 건전지 2개와 전기선, 철제 신관, 테이프 등 파편 30여 점을 수거했으며 테러범이 5번과 6번 출입구의 인도와 횡단보도 쪽으로 파편이 비산하도록 폭파 각도를 맞추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한국 경찰은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가 공항버스 정류장과 택시 승강장이 있어 평소에도 인파가 붐비는데다가 외국인보다 한국인들이 많은 장소이기에 테러범이 계획적으로 노리고 폭발물을 설치한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폭발하면서 발생한 연기의 색깔이 잿빛이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폭발물의 종류는 흔히 ‘C-4’라고 부르는 ‘콤퍼지션-4’ 폭약물로 확정되었습니다. 콤퍼지션은 자동용접 또는 반자동 용접을 할 때에 사용하는 가루형태의 폭발물로, 1983년 북한 테러범들이 미얀마 양곤에서 아웅산묘소 폭탄테러를 자행하면서 사용하였던 폭발물이었고 이 점을 미루어보아 한국에선 이 일을 북한의 테러로 단정 지었습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외국선수단들이 속속 입국하던 중이었고 폭탄테러 발생 다음날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도 방한하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 김포국제공항에서 이런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남한 당국은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폭탄테러를 당하면 우선 현장보존이 중요하지만 사건 발생 후 가장 기본적인 현장 인원 통제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남한 당국에서는 아시아게임으로 입국하는 외국인들도 많고 폭탄테러사건이 알려지면 국제경기에 차질이 있을 것 같다는 우려 때문에 현장을 빨리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김포국제공항 폭탄테러사건은 범행 용의점이 의심되는 외국인들의 출국을 막고 연행 조사했으나 아무 혐의점도 찾지 못하였으며, 1만 달러에 해당하는 포상금을 걸고 인터폴 회원국에도 수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범인은 물론 범행 목적도 밝혀내지 못한 체 미제사건으로 종결되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해 윤일균 초대 국제공항관리공단 이사장은 폭탄테러의 책임을 지고 이사장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치안 본부장이었던 강민창 치안총감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시한폭탄이었던 만큼 범인은 폭탄을 설치한 후 출국해 버렸을 가능성이 컸기에 폭탄테러사건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추측에 의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가안전기획부 이해구 1차장은 당시에 의심할 만한 그 어떤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수사당국에서는 사건의 배후에 일본인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기도 했지만 사건 발생 23년이 지난 2009년이 되어서야 폭탄테러의 범인과 전모가 드러났고 결국 이 일은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 대남연락부가 한 범죄임이 밝혀졌습니다.

북한 대남연락부는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국제공항에 접근하기 위해 테러범을 외국인으로 모색하였고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부 니달이라는 인물이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아부 니달은 1985년 로마 공항, 빈 공항 습격, 1986년 미국 여객기 팬암 103편 납치사건 등을 주도하였고 팔레스타인 해방조직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의 측근까지도 서슴지 않고 죽였던, '사막의 독사'라 불리던 인물입니다.

국제테러범 아부 니달이 북한의 사주로 테러청부를 받고 자기의 조직원들을 대한민국에 잠입시켜 김포국제공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켰다는 자료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스위스 베른 신문의 한 일본인 기자가 발견했다는 동독의 첩보기관 슈타지의 비밀문서였습니다. 통일되기 이전인 당시 동독은 아랍계 테러조직들을 지원했으나 동독이 테러기지로 이용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독의 보위부 격인 슈타지에서 아부 니달을 비밀리에 조사하자 아부 니달은 자신이 저지른 범행전모를 자백하였는데 그 중에 김포국제공항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의 내막도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부 니달은 증언에서 자신이 '빨치산 투쟁'에 공감대가 있던 김일성과 친밀한 관계였고 핵심 조직원들을 북한에서 훈련시키기도 했으며 그러던 차에 북한이 폭탄 테러를 계획하면서 아부 니달은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기로 하고 독일 적군파 출신의 여성 크라베에게 폭탄테러 임무를 맡겼다고 실토했습니다. 또한 그의 증언에 따르면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폭탄테러 당시 북한 테러범들이 사용했던 폭탄 제조방법으로 아부 이브라힘이라는 인물이 폭발물을 제조했고 그의 동거녀였던 크라베가 대한민국의 김포국제공항으로 폭발물을 운반하였습니다. 폭탄 운반을 맡은 크라베는 루마니아 정보기관인 세쿠리타테에서 만들어준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영국인으로 위장한 후 대한민국에 입국하였고 지시대로 김포국제공항에 폭발물을 설치한 후 즉시 홍콩으로 출국했습니다.

김포국제공항 폭탄테러가 성공하자 북한 대남연락부는 스위스 은행의 아부 니달의 비밀 계좌로 500만 달러를 송금했고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결국 김포국제공항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가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북한 노동당 조사부가 국제테러범 아부 니달 그리고 루마니아 정보기관의 합동 테러행위였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던 것입니다. 국제테러범 아부 니달은 2002년 8월 16일 이라크에서 암살당했고 폭탄을 제조했던 이브라힘과 크라베는 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시리아로 달아나 숨어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포국제공항 폭탄테러사건 이후로 대한민국의 공항 보안검색이 더욱 강화되었고 공항 내 쓰레기통은 내부가 잘 들여다보이는 투명재질로 바뀌었으며 무장한 보안요원들이 24시간 공항내부와 주변을 감시하는 체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북한의 대남도발은 같은 동족을 죽이기 위해 외국인 테러범들도 서슴없이 끌어들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국제사회는 북한을 테러국가로 지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