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음악은 사전적인 의미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영역의 음과 소음을 소재로 하여 박자, 선율, 음색 등을 일정한 법칙과 형식으로 종합해서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라고 정의합니다. 북한에서는 음악이 노동당에 의해 창작, 보급 등이 통제되어 왔습니다. 이런 북한의 잘못된 음악에 대한 통제와 탄압에 대해 전 세계는 ‘감성독재’라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당국의 감성독재의 산물인 북한음악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음악의 기만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작성하고 김정일의 논문이라고 공개한 음악예술론에는 북한음악에 대해 주체음악으로 강조하면서 이에 대해 4가지로 강조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체시대는 새 형의 음악을 요구한다, 둘째는 주체는 우리 음악의 생명이다, 셋째는 혁명에 필요한 것이 명곡이다, 넷째로 음악을 대중화하여야 한다. 음악의 대중화라는 미명하에 정치적인 목적달성을 위해 노동당이 감시,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정책화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북한에서 음악은 김씨 일가를 위한 것입니다.
북한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인 문예정책이라는 말을 청취자분들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북한당국은 문학예술정책을 줄여서 문예정책이라고 표현하였고 음악예술인들을 문예전사라고 불렀습니다. 전사라는 말은 전쟁터에서 상급의 지시를 받들고 목숨을 바칠 각오를 가지고 전투에 임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하부 말단 병사를 말합니다. 결국 북한의 모든 예술인들은 상부의 지시,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정책적인 명령을 집행해야 하는 문예전사들입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은 북한 내에 존재하던 다양한 예술단체들을 통제하기 위해 북조선노동당 창당 이후부터 당에 의한 음악예술 통제를 모색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22일에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일꾼들에게 ‘예술단체들을 조직할 데 대하여’라는 내용의 담화를 통해 음악예술을 통제하고 군중을 세뇌시키기 위한 조직적인 시스템을 만들 의사를 표명하였습니다. 1946년 7월 4일에 북한의 첫 예술단체인 중앙교향악단을 창립하고 한 달 후인 8월 8일에는 창단기념공연을 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공연을 관람한 김일성은 참가한 예술인들 앞에서 “음악예술인들은 새 민주조선 건설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1947년 3월에 노동당 중앙상임위원회의 ‘북조선에 있어서의 민주주의 민족문화 건설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여 중앙과 지방에 전문적인 예술단체를 설립하였습니다.
우선 무질서하게 발족되어 활동하던 음악예술단체들을 통제하기 위해 이미 설립된 중앙교향악단을 다시 국립교향악단과 국립합창단으로 개편하였고 조선고전악연구소를 창립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지방들에서 활동하던 예술단체들을 통제하기 위해 1946년 하반기부터 각 도에 예술공작단 음악부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다시 1947년 4월에는 각 도 이동예술대 음악부로 개편하였습니다. 지금의 각 도 예술선전대의 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악기연주를 위주로 하는 예술단체들을 1948년 12월에 국립예술극장으로 통합하였습니다. 결국 6.25남침전쟁 이전에 벌써 북한에는 노동당의 통제하에 창작, 보급, 공연 등이 진행되는 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체계가 마련된 셈입니다.
김일성은 “지금 우리에게는 음악예술인들이 많지 못합니다. 후비를 많이 키워 음악예술인 대열을 빨리 늘이며 우리나라의 음악예술을 활짝 꽃피우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강조하면서 당시에 부족한 예술인들을 양성하기 위해 평양음악전문학교와 해주음악전문학교를 개설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1949년 3월에는 이 학교들을 통합하여 본과 3년과 연구부 2년 학제를 가진 국립음악학교로 개편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사상사업의 기본형식은 선전과 선동이며 선전은 대중에게 당의 사상과 이론, 노선과 정책을 체득시키는 사업이고 선동은 대중을 혁명과업수행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사업”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선전과 선동을 성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진실성, 호소성, 전투성, 기동성, 논리성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서 김일성이 말한 진실성이나 논리성은 대중을 속여 세뇌시키기 위한 감언이설에 불과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당국은 우선 구소련의 선전선동방식을 끌어들였습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크라스나야 아르미야(Красная Армия), 우리 말로 붉은군대 소속의 88특별저격여단에서 5년동안 복무하였던 김일성에게는 러시아 노래들이 생소하지 않았습니다. 북한당국은 소련과 함께 스탈린을 극찬하는 노래와 음악을 보급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주민들의 인식은 소련이 조국해방의 은인이었고 소련군은 해방군이면서 혁명전우였습니다.
해방 후 북한당국은 김일성에 대해서도 절세의 애국자, 영명한 지도자로 존칭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매체들이 새로 생겨나면서 이를 철저히 장악한 김일성은 이를 통해 작가들이 창작한 노래들 중에서 대중을 선동하고 북한당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내용의 음악들만 골라서 내보냈습니다.
북한당국이 1945년부터 6.25남침전쟁을 일으킨 1950년 전까지 창작보급한 노래 중에서 일부를 수록한 ‘조선노래대전집 가요편’을 보면 음악을 대중선동에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있는 23개의 가요 중에 선전선동가요 10곡, 노동을 독려하는 가요 5곡, 노동당 찬양송가 2곡, 김일성 한사람을 직접 지칭한 김일성송가 1곡, 통일관련 가요 1곡, 애정가요 1곡 등입니다. 북한이 선택한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를 선동한 선전가요로는 <애국가> <빛나는 조국> <산업건국의 노래> 등이며 노동을 추동하는 가요로는 <밭갈이 노래>, <비료달구지> <벼가을 하러 갈 때> <바다의 노래> <법성포 배노래> 등입니다. 그리고 1947년에 이찬이 작사하고 김원균이 작곡한 김일성을 칭송하는 노래인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창작·보급되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선전선동가요가 23곡 중 10곡으로 43.5%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노래대전집 가요편에 수록된 노래 이외에도 북한당국에 의해 많은 노래들이 창작, 보급되었는데 거의 모든 음악들이 당과 수령에 대한 찬송가, 체제수호를 독려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노래들이 <5.1절의 노래> <선거의 노래> <남녀평등권의 노래> <빛나는 조국> <새 봄의 노래> 등입니다.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김일성이 일으킨 6.25남침전쟁시기에 전시가요들이 수많이 창작되었는데 이 역시 대중성과 투쟁성을 강조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김일성이 1950년 7월 방송연설에서 강조한 ‘모든 것을 전쟁 승리를 위하여’ 구호에 따라 예술단체들은 전시체제로 개편되었고 2~6명의 소편대 공연단들이 전선과 후방을 찾아다니면서 대중선동을 위한 위문공연을 진행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1952년에 모란봉에 지하건설극장을 건설하였고 이곳에서 대중선동가요들이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가요와 곡들로는 <승리를 향하여> <조선은 싸운다> <돌격대 조선> <승리의 기록> <전사들이 이야기> 등입니다.
김일성 시대에는 관현악과 교향곡 등이 위주였다면 김정일 시대에는 만수대예술단을 주축으로 전자음악과 디스코열풍이 일어났습니다. 흥취 나는 연주에 대중을 기만하고 선동하기 위한 가사를 넣어 세뇌의 수준을 한 계단 끌어올렸습니다. 왕재산경음악단과 보천보전자악단이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보란봉악단으로 계승되었고 청봉악단, 삼지연관현악단 등이 새로 설립되면서 대중음악의 기만성은 한 층 더 교묘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음악은 강제적인 주입이 필요합니다. 지금 북한주민들은 수십 년 동안 김씨 일가와 일당독재만을 찬양하는 노래보다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노래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노래가 북한주민들에게 너무도 친근하게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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