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북한의 동진27호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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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의 어선 납북사건은 공해상이나 대한민국의 영해에서 한국 어선과 어부들을 납치한 사건을 말합니다. 북한의 어선 납치는 대한민국 어선이 어로작업 중에 북한수역에 들어가면서 발생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 한국 해상이나 공해상에서 강행되곤 했습니다. 오늘은 전후 북한이 감행한 어선 납치사건과 함께 1987년 1월에 있었던, ‘동진호 납치사건’이라고 불리는 어선 납북 사건의 전말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후 1955년 5월 28일 고기잡이를 하다가 10명의 어선이 납북되었던 ‘대성호 납북사건’을 시작으로 1980년대 말까지 근 25년 동안 북한에 의해 납북된 어선만 해도 462척이며 납치된 어부는 3,677명입니다. 그중에 송환된 어선은 430척, 어민 3,258명이며 송환되지 않은 어선은 32척에 납치된 어민은 419명에 달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의 어선 납북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불법성을 항의했지만, 북한은 오히려 북한수역에 대한 불법 침범을 주장하곤 했습니다.

북한당국은 1987년 1월 15일 백령도 인근에서 어로작업 중이던 동진27호를 납치하고는 다음 날 노동신문에 선박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조선인민군 해군경비정이 우리측 영해를 불법 침입한 남조선 선박 1척을 단속’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기사에서 북한당국은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 1월 15일 오전 11시 43분경 우리나라 서해 장산곶 서북쪽을 불법 침입한 남조선 선박 1척을 단속했다”며 나포 경위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적십자회는 동진호가 납북된 지 6일만인 1월 21일에 선원들을 송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당시 청진에서 일가족이 배를 타고 탈북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한 김만철 씨 가족과 맞교환하는 조건을 내걸면서 송환 의사를 철회하였습니다.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북한당국은 “우리 공화국 북반부에는 남조선 괴뢰군 포로와 납치된 민간인들이 단 한 명도 없다”며 “동진호는 정탐행위를 위해 침투했던 간첩선”이라고 발표했고 “선원들은 남조선 귀환을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평화적인 어민들에 대한 북한의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로, 실제로 그들은 부모와 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절실히 바랐다는 것이 그 이후에 드러나면서, 국제사회와 대한민국 국민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동진27호가 납북된 지 19년이 되어오던 2005년 10월,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인, 어로장 최종석 씨의 딸 최우영 씨는 김정일 앞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아버지의 송환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으로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를 우선시하면서 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진행할 당시, 북에 납치된 아버지가 행여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가져보았으나 끝내 아버지의 송환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진27호 납북자들에 대한 소식은 2000년 이산가족상봉에서 갑판장 강희근 씨가 어머니 김삼례 씨를 상봉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차 이산가족 방북단에 포함되어 2000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3일 동안 평양을 방문한 어머니 김 씨를 만난 강희근 갑판장은 상봉 둘째 날에는 어머니 70회 생일상을 차려주었습니다. 이 생일상은 아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북한당국이 아들의 생활이 윤택한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 준비한 것이라는 사실은 청취자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북한당국은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2달 전에 강희근 갑판장을 노동당에 입당시키고 저들의 각본에 따라 말을 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강희근 씨는 북한의 언론매체들에도 북한당국이 시키는 대로 기사를 썼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습니다. 1951년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에서 태어나 25살부터 동진호를 타기 시작했던 그는 기사에서 북한에서 살게 된 경위에 대해 “지난 87년 1월 공화국 영해 깊이 침투하여 정탐행위를 하다가 단속되었다”, “나는 이전부터 동경해 오던 공화국 북반부에 남기로 스스로 결심했다”, “북한에서 결혼하여 아들도 낳아 키우면서 살고 있으며 국가적인 대회에도 참가하고 훈장도 받았다”며 자기의 북한 생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평남 순천시에 거주하는, 동진27호 기관장이었던 김상섭 씨도 2003년 9월 8차 이산가족상봉 때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2004년 3월에 진행된 9차 이산가족상봉 때에는 황해북도 은파군에서 공장 기술자로 일하던 선원 양용식 씨도 아버지와 감격스런 상봉을 했습니다.

2005년 11월 8일 금강산호텔에서 진행된 12차 이산가족상봉 때에 동진27호 선원으로 북한에 납북되었던 정일남 씨와 어머니의 상봉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18년 만에 아들을 만난 어머니 김종심 씨는 며느리와 손자, 아들에게 둘러싸인 채 넋을 잃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18년 동안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살아온 어머니의 눈물은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게 하였고 북에서 결혼한 정일남 씨는 부인 리금옥 씨와 딸 정은혜 양, 아들 정은혁 군을 데리고 이산가족상봉에 나왔는데, 며느리는 ‘건강하게 살고 있으면 됐지요. 왜 웁니까?’라며 시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할머님과 상봉한 손자와 손녀도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장손입니다”라며 인사를 했고 아들 정 씨는 “다 잘 살고 있다”며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이다가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5년 전 폐암으로 돌아가실 때 대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네 이름을 부르다 돌아가셨다”고 말하자 두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북한당국은 그들이 간첩 활동을 했고 동진27호도 어선이 아닌 간첩선이라며 돌려보내지 않았지만 이산가족상봉에서 어머님과 상봉했던 정일남 씨의 과거사가 밝혀지면서 북한이 주장했던 모든 것이 허위였음이 드러났습니다.

정일남 씨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에서 이발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발사보다 수입이 더 높은 어부가 되기 위해, 납치되기 1년 전인 1986년에 부모님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고기잡이배를 탔습니다. 1년 후 아들이 동진27호가 납북되면서 북한에 납치되자 마을 이장이 “배 타는 아들이 북에 납치됐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지 않고 다른 집 아들일 거라고만 생각하다가 겨울이면 집에 와서 지내던 아들이 그해 겨울부터 보이지 않자 아들의 납북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4명의 어부들은 이산가족상봉을 통해 부모님들을 만나 소식을 알게 되었지만 어로장 최종석 씨와 선장 김순근 씨, 선원 김영현, 노성호, 박광현, 진영호, 추영수 씨는 그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납북어민 중 임국재 씨는 2003년 9월, 2004년 4월, 2005년 초 세 차례 탈북을 시도하다 실패한 뒤 ‘납북자가족모임’에 구명 요청을 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탈북하려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 되었고 청진에 있는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동진27호 선원들은 모두 12명으로 그중 임국재 씨는 1954년생 최연소 선원이었습니다.

꽃다운 청춘에 고기잡이 어선을 탔다가 북한에 납치되어 끌려간 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500여 명, 납북어민들의 비참한 삶은 분단된 우리 민족의 슬픈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제일주의를 외치지만 6.25남침전쟁을 일으켜 400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후에도 수백, 수천 명의 남한주민들을 납치와 테러로 귀중한 목숨을 앗아간 북한의 김씨왕조는 그래서 전 세계인들의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