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현대화를 통한 세뇌 선전-왕재산경음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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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정일의 지시로 1969년 9월에 만수대예술단이 생겨나 1970년대에는 만수대예술단이 북한 예술선전선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만수대예술단이 설립되어 14년 후에 생겨난 왕재산경음악단은 그 당시 한창 대두하고 있던 전자음악을 도입한 새로운 예술단체라는 의미에서 북한주민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재산경음악단도 만수대예술단과 마찬가지로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선전과 대를 이은 충성심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기능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화되면서 1980년대 초부터 자기의 정치적 지반을 든든히 하기 위한 일환으로 항일 투사 2세대들을 고위 권력의 자리에 앉히는 한편 우상화선전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음악예술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1983년 7월 22일에 새로 설립된 것이 왕재산경음악단입니다. 북한당국은 “우리식의 경음악과 현대무용의 발전’과 ‘발전하는 현실과 더욱 높아가는 우리 인민의 미학·정서적 요구에 맞게 경음악과 무용을 더욱 현대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내용의 설립 배경을 강조하였습니다.

왕재산경음악단이 북한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9년 7월에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부터입니다. 그동안 김정일의 지시로 비공개로 북한 고위급간부들의 비밀파티들에 출연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미칠 후과 때문이었습니다.

1989년 축전을 앞두고 6월 30일 노동신문에도 ‘다채로운 예술공연 진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6월 28일에 동평양대극장에서 진행된 왕재산경음악단 종합 공연 소식을 전했습니다. 전자악기들이 등장하고 북한주민들의 생활을 반영한 노래들이 불려지면서 김부자를 칭송하는 노래만 듣고 불러왔던 사람들은 새로운 음악세계에 심취되었습니다. 특히 민요들인 '물레타령‘, ’신고산 타령‘, ’뽕 따러가세‘, ’까투리 타령’ 등은 ‘김일성 만세’, ‘김정일을 받들자’ 라는 내용이 들어간 우상화선전노래보다 더 듣기 좋았던 것입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에서는 대학생들끼리 1988년에 대학에서 발생했던 투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왕재산경음악단을 전격 내세우기 1년 전인 1988년에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노래만 불러야 하는 북한 현실과 일당독재를 반대하는 익명으로 된 투서들을 평양시 각 구역 체신소 우체통에 넣어 김정일에게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문의 편지에서 주체사상의 반동성과 노동당 일당독재의 반 인민성,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순, 그리고 예술마저 한사람을 위해 복무하는 현대판봉건왕조 김씨 일가에 대한 비판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투서 사건에 가담했던 대학생들은 국가보위부 수사망이 좁혀지면서 한명은 김일성종합대학 1호교사 9층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고 나머지 8명은 모두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왕재산경음악단의 공연을 보면서 “투서대학생들이 음악예술의 경지를 바꾸어 놓았다”고 아는 친구들끼리 수군거리었습니다. 후에 그들이 출연한 공연들이 CD알(CD플레이어)을 통해 공개되면서 고위간부들만 참가하는 밤파티에 노출된 의상을 입고 외국 노래 반주에 맞춰 외국 춤들을 추는 장면은 북한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자아냈습니다.

왕재산경음악단은 3개의 조로 구성되었습니다. 주로 남성들로 구성된 기악조와 여성 중심의 성악조와 무용조였습니다. 북한당국은 1992년 조선음악연감을 통해 왕재산경음악단 배우선발기준이 16세에서 25세까지인 사실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잘 알려진 배우들로는 렴청, 장윤희, 엄정녀, 현송월, 정춘희, 렴동선, 최광호 등이었습니다. “색소폰은 퇴폐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악기”라고 선전하던 북한당국이 왕재산경음악단 공연에서는 색소폰을 무대에 올렸는데 당시 색소폰 연주가로는 최희태, 김순길, 황승철 등이었습니다. 여기에 전기기타연주에는 한철수, 김영란, 송은심, 전기바이올린에는 전일, 김철령, 전광수 등이었습니다.

기악조에는 삼지연조, 삼태성조, 삼일포조, 목란조 등이 있었고 전자악기들로 이루었습니다. 전자악기 중에서 닭 울음소리, 말발굽소리, 물소리, 파도소리, 새소리 등 다양한 소리도 낼 수 있는 신시사이저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저도 당시 동평양대극장에서 왕재산경음악단 공연을 보았는데 저의 옆 좌석에 앉았던 한 관람객은 저에게 “저 신시사이저는 세계적으로 발전된 나라들에서도 무대에 올리기 힘든 고가의 악기이며 다루는 기술도 쉽지 않다”며 들뜬 기분으로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북한당국은 왕재산경음악단의 공연 무대와 노래 선정도 특색 있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지난 시기 평양대극장이나 모란봉극장 무대처럼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색조명과 무대장식등이 새로워졌고 북한 언론에도 눈부신 무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무대의 뒤 배경에는 화려한 색조명으로 장식하였고 무대바닥에도 여러 가지 색깔과 모양의 전구들을 설치하여 예전의 무대와는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노래 선정도 김씨 우상화 선전가요들과 함께 생활을 반영한 민요들도 함께 등장시켜 관람객들은 “우리 예술도 변화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꾀하였습니다. 당시 유명한 가수였던 렴청이 부른 가요들로는 ‘정일봉의 우뢰소리’, ‘물레타령’, ‘하늘아래 첫 집’, ‘신고산타령’, ‘웃음꽃이 만발했네’, ‘뽕 따러 가세’, ‘까투리 타령’ 등이었습니다.

왕재산경음악단 공연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배우들의 의상이었습니다. 지난 시기 양복(정장)이나 조선옷(한복)을 입고 노래를 불렀던 만수대예술단과는 달리 북한주민들이 처음 보는 생소한 무대복들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여성배우들은 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광택 소재의 무대복 상의와 허벅다리까지 드러난 짧은 치마(미니스커트)를 입고 출연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색조명에 비쳐진 의상과 배우들의 자태는 처음 보는 당시로는 환상적인 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북한당국은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왕재산경음악단 공연을 보여주었으며 중국에도 파견하여 공연하도록 하였습니다. 1991년에 중국 베이징 전람관극장, 상해시 인민정부극장, 남경 강소성 인민대회당 등에서 왕재산경음악단 공연이 7차례나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복귀되면서 체제위기상황에 직면한 북한당국이 중국과의 우호동맹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차원에서 해외공연을 기획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부른 노래들 중에는 중국노래들도 많았습니다. 무대에 올린 대표적인 곡들로는 경음악 ‘룡강타령’, 렴청 독창 중국가요 ‘백리에 대한 푸른 봄의 정’, 김화숙 독창 중국가요 ‘장강의 노래’, 장윤희 독창 중국가요 ‘사랑의 선물’, ‘갈망’, 최광호와 렴청의 혼성2중창 중국가요 ‘친정집 찾아가네’ 등이었습니다.

1983년에 설립된 왕재산경음악단은 당시 북한주민들에게 생소했던 신시사이저와 전기바이올린, 전기기타 등 전자악기들에 곁들어 노출의상’과 환상의 무대로 북한주민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채 거의 6년 동안은 김정일과 고위간부들의 술좌석이 마련된 밤파티에 초청되어 공연하였습니다. 이렇듯 아랫도리가 다 드러나도록 짧은 치마를 입고 무대를 뛰어다니면서 발을 쳐들고 바닥을 구르면서 광란적으로 추는 춤은 비공개로 공연되었습니다. 그 공연장면들이 CD알로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접하게 되었고 “이런 공연은 어디서 몰래 했던 거냐”며 혼자 이런 공연을 보았던 김정일에 대한 불만을 은근슬쩍 비추기도 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이 공연장면이 담긴 CD알을 회수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드러난 의상의 의아한 왕재산경음악단의 춤 공연이 담긴 CD알들은 통제를 하면 할수록 주민들 사이에 인기있는 예술공연으로 인정되어 거래되었고 거의 모든 북한주민들이 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북한당국은 왕재산경음악단 공연 중에서 노출이 적은 공연들만 공개하면서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춤추는 공연은 유포되는 것을 통제하려 하지만 진실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