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3대혁명소조운동은 김씨 일가의 3대세습을 가능하게 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후계 세습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그리고 김정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북한에서 김정일이 후계 세습을 가능하게 하였던 3대혁명소조운동의 발단과 이 운동의 특징, 북한사회전반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여러 시간에 걸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북한 3대세습에 큰 역할을 하였던 3대혁명소조에 대해 이해하자면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였던 1963년부터 3대혁명소조운동이 시작된 1973년까지의 10년 동안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2살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특혜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배치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초반의 대학졸업생이 중앙당에 배치 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습니다.
김정일이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 지도원으로 배치될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유일적인 영도체계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북한의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분야 고위간부들 중에는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에서 복무한 88저격여단 출신들 외에도 국내파 출신들을 비롯하여 여러 갈래의 파들이 존재하면서 서로 견제하였습니다.
천성적인 권력승계 욕구가 강했던 김정일은 1964년 6월에 중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사회 첫발을 뗐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막내동생이자 김정일의 친삼촌이었던 김영주가 중앙당 조직지도부장을 하고 있던 관계로 김정일에게 당 사업을 배워준다는 취지에서 조직지도부에 배치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김일성도 내각수상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고 북한주민들도 김일성을 지칭할 때 앞에 존칭수식어인 ‘경애하는’ 혹은 ‘위대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김일성 수상님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이 나오기 전이어서 ‘신격화’나 ‘신조화’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고위층들은 물론 일반 주민들도 김일성의 후계자로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북한 내각 부수상이었던 박금철을 비롯한 국내파들이 오히려 중앙당과 내각, 그리고 지방 당 및 경제 분야의 고위직책들을 맡아 북한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내각부수상이었던 박금철은 같은 갑산파였던 중앙당 선전비서 김도만을 시켜 박금철을 우상화하는 내용의 문학작품인 영화 <일편단심>을 만들어 보급하게 하였습니다. 일편단심은 박금철이 일제에게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할 때 그의 부인이 절개를 지킨 내용을 주제로 한 박금철의 반일투쟁역사를 선전하기 위한 영화였습니다.
김정일은 자기의 후계 야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박금철을 처형하기 위해 최현을 비롯한 빨치산 출신 ‘투사’를 사촉하여 1967년에는 그 그룹인 갑산파를 완전히 숙청하는데 성공합니다. 김정일은 그때에야 문학작품이 후계 세습을 위하여 중요한 선동수단임을 깨닫고 중앙당 선전선동부로 옮겨 북한의 문화예술부분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69년 9월에는 중앙당 선전선동부장이 되어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내용을 담은 혁명가극 ‘피바다’, ‘당의 참된 딸’, ‘꽃 파는 처녀’를 창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적 영도가 확고 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에 의해 3대혁명소조운동이 발기되면서 북한에서는 공산권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후계 세습이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 하던 당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국가들에서는 권력승계를 부자간에 한 사례도 없었고 이것을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3대혁명노선을 제시하면서 3대혁명은 사상혁명, 기술 혁명, 문화혁명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혁명이란 기존의 틀을 타파하고 새로운 진보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상혁명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자세습의 정당성을 선동하기 위하여 김씨 일가를 신격화하기 위한 계책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5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우상화선전을 통한 사상전을 통하여 김씨 일가를 ‘혁명일가’로 둔갑시키기 위한 선전선동 전략의 일환으로 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하였습니다. 후계세습의 당연성을 위한 사상혁명은 ‘인간개조’, ‘사상개조’라는 용어로 3대혁명소조를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의 지시로 각 당 조직에서 선발한 일군들과 대학졸업생들로 3대혁명 지도소조를 시험적으로 경공업공장들에 파견하였습니다. 시험적으로 파견된 3대혁명지도소조의 역할에 만족한 김정일은 그 결과를 토대로 1973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경공업부문에 한정되었던 지도소조를 전국의 주요 기업소들과 협동농장농장들로 확대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1972년 11월 철도운수부문에 지도소조를 파견하였고 1973년 1월에는 노력예비를 동원하기 위한 지도소조를 주요 공장, 기업소들에 파견하였습니다.
후계자 세습을 위한 끈질긴 김정일의 노력에 김일성도 만족감을 나타냈습니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지시로 1973년 2월에 소집된 공업부문 3대혁명소조원 강습과 농업부문 3대혁명소조원 협의회에서 3대혁명소조원의 활동지침을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달 후인 1973년 3월에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강서확대회의에서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더욱 힘있게 다그치자"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하여 3대혁명소조를 파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역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지도소조를 핵심당원들과 대학졸업생들로 파견하였으나 점차 범위를 넓혀 당중앙위원회 책임간부들과 지방당일군들, 국가경제기관과 근로단체 간부들, 과학자들과 청년인텔리들로 확대하였습니다.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를 우리식의 현대판 ‘암행어사’라고 내부강연에서 밝히면서 북한사회에서는 3대혁명소조는 김정일의 전위대, 현대판 암행어사라는 말들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소조원들은 우선 맡겨진 단위의 혁명사상교양실 관리운영을 장악하여 당중앙위원회에 3대혁명소조사업부를 통하여 보고하였으며 직보(직접보고된다는 약자)된 자료는 김정일에게 전달되어 중앙당검열이나 중앙검찰소 검열그루빠들이 현지에 내려와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3대혁명소조원들은 파견단위에서 진행하는 사상학습과 정치행사진행정형도 요해하였고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내려 보내는 김씨 일가 우상화선전 강연제강 침투에도 관여하면서 암행어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전국 각지로 그물처럼 뻗어 나갔던 3대혁명소조는 북한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을 위한 사업에서도 막강한 자기들의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1974년에 김정일은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을 내놓고 이의 관철을 위해 3대혁명소조원들이 파견 단위의 당 조직과 합심하여 강한 사상투쟁을 벌릴 데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북한사회는 3대혁명소조원들의 직보에 의해 많은 간부들이 해임, 철직되었으며 지어 정치범으로 낙인 찍혀 정치범관리소로 가기도 하였습니다.
김정일은 다른 공산권국가들에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던 부자 세습을 3대혁명소조같은 거미줄같이 뻗어나간 조직을 통해 확고히 실현시켜 나가면서 그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결국 3대혁명소조운동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오늘은 후계 세습을 위한 김정일의 계산된 셈법으로 생겨난 3대혁명소조운동의 발단 과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시간에는 3대혁명소조운동의 활동에 대해 얘기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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