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 얘기해 드릴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의 암살조를 태운 325톤급 잠수함이 1996년 9월 대한민국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동해상에서 좌초되면서 벌어진 북한 대남도발사건입니다. 1996년 10월 7일 강원도 춘천에서 진행되는 전국체육대회 개막식에 참가해 연설을 하게 될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1996년 9월 14일 오전 5시 함경남도 퇴조항에서 잠수함을 탄 26명의 북한 암살조는 정찰국장의 환송을 받으며 북한을 출발했습니다.
북한 퇴조항을 출항해 20시간이 지난 9월 15일 1시, 강릉 앞바다 해안가에 도착한 잠수함은 또 20시간 동안 바다 밑 해저에 정박하고 있다가 밤 9시가 되어서야 정찰조원 3명과 안내조원 2명을 상륙시켰습니다. 안내조는 정찰조원들의 안내를 마치고 잠수함으로 복귀하였고 3명의 정찰조원들은 작전에 필요한 정찰을 목적으로 강릉 군용비행장과 레이더 기지, 항만, 화력발전소 등을 정찰하였고 카메라로 촬영하여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날인 9월 16일 밤 9시, 잠수함은 정찰조의 복귀를 위해 해안가로 접근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공해상 해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그 다음날인 17일 밤 11시경에 접근을 시도하였지만, 암초에 걸려 좌초되면서 승조원들까지 해안으로 상륙하여 작전에 투입되게 된 것입니다.
잠수함이 발견된 첫날 오후 4시 40분경에 강릉시 강동면에서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한국 경찰 2명이 안내조에 속해있던 공작원 이광수를 체포하였고 오후 5시경에는 11명의 남파 공작원 시신들을 한곳에서 무더기로 발견하였습니다. 북한 무장공비들이 일행 중 11명을 현장에서 처형하였는데 이는 앞으로 공작임무를 수행하는데 방해가 될 잠수함 승무원 등 비전투원들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체포되면 암살과 테러의 목적이 드러날 수 있다는 위험을 미리 제거한 셈이죠.
생포자 이광수가 체포되면서 한국 정부는 잠수함의 좌초사실과 무장공비들의 신원을 알 수 있었고 10명 정도로만 생각했던 무장공비가 26명이라는 사실에 작전의 규모도 그에 맞게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광수가 생포되는 과정의 일화가 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시골 가정집들에 전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던 이광수는 신고자의 남편이 다가와 "송이버섯 따러 오셨냐?"고 묻자 그렇다고 말하며 잡담을 하는 사이에 부인이 전화로 경찰을 부른 것도 알 수 없었죠. 전화로 신고한 줄 알 수 없었기에 이광수는 갑자기 들이닥친 2명의 경찰관들에 의해 생포되었고 생포 직후에 침투 인원이 총 20명이라거나 민방위 훈련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는 등 거짓 진술을 하여 작전에 혼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거짓 진술의 이유에 대해 “동료들을 위해 하루만 버티면서 시간을 끌어주면 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생포자 이광수는 “1996년 9월 13일 저녁, 정찰국장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당세포총회에서 정찰 임무를 정확히 수행하겠다는 맹세문을 낭독하고 서명한 후, 정찰국장이 준비한 연회에서 임무수행을 잘하라는 격려를 받으며 저녁을 즐겼다”, “14일 새벽 5시 정찰국장의 환송을 받으며 낙원항을 지나면서부터 수중 공기관과 잠망경을 올리고 배는 물속에 들어갔고 해상남북경계 한계선 5마일쯤 된 지점에서 기관을 끄고 잠망경도 내리고 물밑 60m∼70m에서 남쪽 강릉 앞바다로 들어왔다”, “정찰조를 침투시키기 위해 나와 물속에 있다가 17일 접선하러 들어가던 중 잡혔다”고 진술했습니다.
26명의 무장공비 중 생포자 1명과 처형된 11명을 제외한 14명의 남은 무장공비들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에 대한민국 국군 36사단을 비롯한 인근 육군 보병사단과 최정예 특수전 전력인 특전사 병력이 동원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 1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 소속 함정 23척이 동원되었고 지상전력으로 제1해병사단에서 출동한 수색대 및 보병 병력, 해군 특수전 전단 병력도 진해 및 동해에서 급파해 동원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에서는 18전투비행단과 공군작전사령부 소속 항공기들이 76회의 항공작전을 포함해 하루 지상작전투입병력 평균 43,000여명이 작전에 침투되었고 대한민국 경찰청도 전투경찰들로 구성된 타격대와 기동대 등을 대거 투입하였습니다.
첫 교전은 9월 19일 10시 경 20여 분간 발생해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2시 경 강릉 구정면의 칠성산 일대에서 특전사 3여단 병력이 북한 무장공비 3명과 조우해 투항유도에도 불응한 무장공비 3명을 사살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경에는 오이골 일대에서 1명이 사살되어 하루 동안 무장공비 7명이 사살되었습니다. 9월 21일에 1명, 22일에 1명, 28일에 1명, 30일 1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사살되었습니다. 살아남은 2명의 정찰조 무장공비들은 10월에도 강원도 용평 스키장과 월정사 일대에 숨어서 도주할 기회를 노렸으며 10월 8일 오후 2시경에는 평창군 탑동리 일대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을 오르던 민간인 3명을 살해하였습니다.
잘 훈련되었던 이 정찰조 무장공비 2명은 10월 9일 오후 9시경에는 오대산 일대의 대한민국 매복조와 30분간 대치상황을 벌이다가 도주하였고 14일에는 인제군의 한 민가와 자동차를 습격해 식량을 절취하였으며 22일에는 대한민국 국군 2사단 표종욱 일병을 살해한 뒤 전투복 등을 절취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의 수림 속을 누비며 숨어 다니던 무장공비들은 11월 5일 새벽 4시 20분 경, 인제군 북면 용대리 자연 휴양림 입구에 있는 연화교 매표소 통나무집에서 매복하고 있던 아군 매복조와 교전하여 공비 1명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숲으로 도주했습니다. 부상당하지 않은 무장공비 1명이 보복 공격으로 총을 난사하였고 뒤따라 추격한 대한민국 장병들이 어두운 새벽을 틈타 조준사격을 하는 무장공비들의 총탄에 사상자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날이 밝아서 10시가 되어서야 대한민국 특전사 3여단의 장선용 상사가 배후에서 접근하여 마지막 무장공비인 정찰조원 2명을 사살하였고 이로써 길고도 길었던 강릉 무장공비 대간첩작전은 개시 49일 만에 종료되게 되었습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급사하고 대내외활동을 멈추고 은거해 있던 김정일에게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을 암살하여 기쁨을 주려고 인민무력부 정찰국에서 기획했던 무장공비 대남도발은 26명 중 25명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무장공비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던 해상처장 대좌 김동원은 50살이었고 부처장 김상훈 상좌는 48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수함 승조원들이었던 정치지도원 신영길은 34살이었고 항해사 대위 리영호와 승조원들인 김승호, 송동철, 김동현, 변의정, 리영철, 김철진, 박정관은 27세부터 31살의 젊은 군관들이었지만 11명 모두 9월 18일 한날 한시에 자살하였습니다.
함장인 중좌 정영구는 42살, 부함장 소좌 류림은 38살, 부기관장 대위 박태홍은 31살이었으며 전투원들인 한민섭, 김창복, 량봉선, 김연호, 리철진, 김영일 등은 28세부터 31세의 젊은 군관들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에 생포된 이광수는 당시 나이가 31살이었고 자수하고 귀순하여 기자회견을 한 이후 대한민국 장교로 임관되어 지금까지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충실히 복무하고 있습니다. 김씨왕조의 총알받이로 청춘을 바쳐야 했던 무장공비들의 비참한 최후는 김씨왕조의 붕괴와 함께 북한주민들에게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