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1994년 김일성이 급사하고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에서 아사자들이 속출하면서 주민들은 물론 간부들마저 북한 체제에 대한 불신이 커졌습니다. 북한 대남통전부는 김정일의 지시로 김일성이 죽은 지 1년이 되던 1995년 7월 9일에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던, 당시 나이가 50세인 대한민국의 안승운 목사를 중국 길림성 연길 시에서 납치했습니다.
안승운 목사는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서, 1990년대 초부터 조선족 교회를 도우며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학원도 세워 선교활동도 열심히 하였고, 중국에서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들을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1983년 3월, 38세의 나이에 목회자의 길에 접어들었던 안승운 목사는 1987년 신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로 활동하였고 1990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연길을 중심으로 조선족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안 목사는 연길시 교육국의 허가를 받아 연길 외국어훈련원을 설립하여 조선족 학생들의 외국어 교육을 도왔으며 연변지역 한족들을 위한 신학원을 설립하여 동북지역에서의 선교활동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조선족 청년들의 학업과 신앙교육에 정력을 다하면서도 북한에서 탈출하여 숨어살고 있는 탈북민들을 도와주던 안 목사의 명성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조선족은 물론 탈북민들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5년 7월 북한에서 파견한 납치조가 안승운 목사에게 접근해 결국 7월 9일에 연길에서 납치해 북한으로 압송했습니다. 북한의 무역회사 직원으로 위장하고 연길 등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당시 39살의 북한 납치범 이경춘은 안승운 목사를 납치하기 9개월 전인 1994년 11월부터 북한이 안 목사를 납치대상으로 지목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훗날 이경춘이 중국 공안에 잡혀 진술하면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내막을 알지 못했던 안 목사는 납치범 이경춘이 평시에 자주 접근해 온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이들 사이는 점차 친밀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족들의 외국어 교육과 신앙교육 뿐만 아니라 탈북민들도 도와주는 안승운 목사에게 북한의 대남통전부와 국가안전보위부는 눈독을 들이고 납치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안승운 목사를 납치하기 위해 이경춘 외에도 51살의 강영철, 30대 중반의 안성철을 파견했고 조선족들인 31살의 채춘자와 34살의 안태근, 홍영일이 납치하기 14일 전인 6월 25일 납치예행연습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치밀한 사전 계획과 예행연습을 통해 최종 납치는 안 목사가 가족이 거주할 아파트를 보려던 7월 9일에 강행되었습니다. 이날 오후 2시 30분경 연길시 시빈관 근처 주택가에서 아파트를 물색하던 안 목사에게 납치범 이경춘이 다가와 그를 유인했습니다.
아파트를 구하는 것을 도와준다는 이경춘의 말에, 택시를 타고 연길 대공원 근처 전자공장 앞에 도착한 안 목사는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지프차에 옮겨 탔습니다. 안 목사를 태운 지프차는 연길 도심을 빠져 나와 도문시 량수에 도착했습니다. 두만강이 바라보이는 중국 강안에 도착해 납치된 것을 알게 된 안 목사는 “나를 납치한 것이냐”고 물었지만 납치범들은 “가보면 알 것이다”라며 강제로 그를 끌고 강을 건넜습니다. 이경춘을 포함한 북한 납치조 3명이 안 목사를 호송해 수심이 무릎을 치는 두만강을 건넜던 것이죠.
두만강을 건너 북한 강안에 입북한 납치범들은 안승운 목사를 함경북도 온성군 사회안전부 분주소에 넘겨주고 이경춘만 연길로 복귀했습니다. 체포 후 그는 “평소처럼 일상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의심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연길로 다시 들어왔다”고 실토했습니다.
이미 요시찰 인물로 중국 연길시 공안당국에 지목되었던 이경춘은 안 목사가 납치된 이후에 함께 이동했다는 증인들의 제보에 따라 몇 차례 공안조사 요청으로 소환명령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결국 심양행 비행기를 타려다가 연길공항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심양주재 북한 총영사가 이경춘이 체포되자 면담을 요청해 중국 공안당국이 입회한 가운데 면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면담장소에서 이경춘은 “내가 잘못했다. 중국법을 모르고 사람을 데려갔다”고 진술해 중국 공안당국은 이경춘의 면담 내용과 수사결과 등을 토대로 이경춘을 안 목사 납치범으로 결론을 내리고 재판에서 2년 징역형과 강제추방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안승운 목사가 납치된 지 보름이 되던 1995년 7월 24일에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그가 자진 월북했다는 허위방송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북한 정권은 안 목사를 평양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등에서 예배하도록 강요했고 그가 눈물을 흘리며 설교하는 영상이 대외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아사자가 발생하고 경제난으로 허덕이던 북한당국이 국제사회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종교를 활용하였다는 것은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책이 나오거나 기독교를 믿으면 예수쟁이라면서 정치범으로 몰아 처형하는 북한에서, 1990년대 중반에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장충성당 등에서 목사들과 신부들이 예배를 하는 모습은 국제적십자의 지원을 위한 ‘종교자유 속임수’였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북한이 안승운 목사가 자진 월북했다고 공개하자 안 목사의 아들은 이것은 북한당국이 만들어낸 허위방송이라며 “저희 가족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토록 가정적이셨고 저희 자녀들을 사랑하셨던 아버님이 우리 가족에게 한마디 상의 없이 북한에 자진 월북해 가신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은 위로의 말도 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진 월북이 아니냐는 눈초리로 저희 가족들을 마치 간첩의 가족인 냥 쳐다보았고 그러한 의심들이 저희 가족을 너무나 힘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중국정부가 그 달 7월에 납치범으로 북한인 이경춘을 체포하여 징역 2년과 강제추방 판결을 내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년 징역형을 마친 납치범 이경춘은 형기가 만료되어 북한으로 추방되었고 결국 안승운 목사는 자진월북이 아닌 강제납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지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납치범은 형기를 마치고 북으로 돌아갔는데 납치당한 안 목사는 가족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1953년 전후부터 현재까지 북한에 납치된 대한민국 국민이 약 4천여 명이며 그중 500여 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2000년 9월 2일 대한민국 정부가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북한으로 돌려보낸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안승운 목사의 가족을 비롯해 납북자 가족들은 북한으로 돌아가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면서 북한에 강제로 납치된 부모형제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으나 끝내 납북자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2009년 9월 대한민국 적십자회는 안 목사를 비롯한 납북자들의 이산가족상봉을 성사시키려고 북측에 생사확인을 요청했으나 북한에서는 안 목사에 대해서 ‘확인불가’라는 통보를 보내왔습니다. 저들을 납북시켜 교회에서 예배를 하도록 강요하면서 조선중앙통신과 TV에도 공개하고도 이렇게 확인불가라니, 이것은 정말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 비전향 장기수들을 돌려보냈듯이 김정은도 납북자들을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북한이 동서고금에 가장 살인적인 집단이라는 오명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길 바라면서 오늘은 여기서 방송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