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진짜 ‘한별’은 김인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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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초기 혁명활동 시기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한별’이라고 불렀다고 했지만 진짜 한별은 조선공산당 산하의 화요파 주요간부였던 김인묵의 별명이라는 사실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성주를 한별로 부르게 된 사실이라며 기록된 내용은 2권 4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이며 그 중 2절 ‘준엄한 봄’과 6절 ‘혁명시인 김혁’에 실려 있습니다.

1930년 봄, 김일성의 나이는 18세였고 당시 김성주가 우상으로 여기던 차광수의 나이는 25살이었습니다. 1927년 8월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일어나면서 중국공산당의 난창폭동, 추수폭동, 광저우폭동 창사폭동 등으로 공산당의 무장투쟁은 이미 시작되었으니 김일성이 처음으로 무장투쟁노선을 제시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합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덜렁광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차광수가 한번은 노상에서 손아래뻘인 나를 만나 반가워서 두 팔로 안아 들고 몇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차광수는 “이제는 급변하는 환경에 맞게 우리 혁명이 새로운 기치를 들고 전진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시 실제 이름이 김성주였던 김일성은 이에 “청년공산주의자들로 새형의 당을 창건하는 것과 무장투쟁에로의 이행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성주가 14살 되던 1926년, 당시 만주의 장춘, 회덕현, 이통현 등 일대에서 활동하였던 이종락이 먼저, 반제운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이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러니 새형의 당 창건과 무장투쟁노선을 어린 김성주가 제시했다거나 그의 영도력과 탁월한 사상이론에 매혹된 공산주의 애국청년들이 감격한 나머지 김성주의 이름을 한별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역사왜곡인 것입니다.

2권 4장 6절 ‘혁명시인 김혁’에도 김성주의 역사왜곡은 계속됩니다. 김일성은 김혁을 처음 만났을 때 “상해에서 불원천리하고 우리를 찾아온 김혁 형에게 삼풍여관 식당에 가서 국수를 대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어린 김성주는 김혁을 형이라고 부르며 우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김혁이 상해에서 만주지방에 왔던 것은 김일성의 표현대로라면 “몸매가 날씬하고 복성스럽게 생긴 미모의 여성” 승소옥과의 사랑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첩에 김혁의 시를 베껴 가지고 다니며 시도 잘 읊고 노래도, 연설도 잘하여 길림시내 청년치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승소옥은 김혁을 열렬히 사랑했고 김혁도 승소옥을 열렬히 사랑했다고 김일성은 회고했습니다.

삼광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창신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이었던 승소옥의 아버지 승춘학은 그들의 사랑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승소옥의 어머니는 김혁을 좋은 사윗감이라고 생각하면서 딸이 김혁을 사랑하는 것을 눈감아주며 남편 앞에서도 은근히 두둔했다고 합니다. 김혁의 오랜, 열정적인 사랑으로 승소옥의 부친인 승춘학도 그들의 약혼을 허락하였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김혁이 길림에 왔던 것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친구였던 차광수를 만나기 위해서였고 승소옥과의 애정으로 길림에 오래 머물게 된 것입니다. 결국 김혁이 김성주의 매력에 이끌려 길림에 왔다거나 함께 혁명을 하기 위해 그곳에서 활동하였다는 역사왜곡에 우리는 절대로 속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 등장하는 차광수와 박도범, 서정애와 함께 김혁이 김일성을 ‘한별’이라고 불렀던 적도 없고 또한 1928년 10월 김혁이 김일성을 우러르면서 시 조선의 별을 짓고 여기에 곡조를 붙여 부르게 된 노래가 ‘조선의 별’이라고 하지만 당시 이런 노래가 보급되었거나 불린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이 노래를 지은 김혁에 대해 꾸짖기까지 했다고 하니 얼마나 역사왜곡에 능한 인간인지는 청취자 여러분들도 십분 이해하리라고 봅니다.

당시 한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은 김성주가 아니라 조선공산당 화요파의 간부였던 ‘김인묵’이었던 것이 당시 만주지역에서 살았던 300여 명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평안도 출신인 김인묵은 1919년 3월 3.1만세운동 이후 러시아에 가서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화요파 동만주 선전부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김일성은 그에게서 공산당 이론과 반제반봉건투쟁노선에 대한 지식을 배웠습니다.

김성주에게 당시 한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인묵을 소개해 준 사람은 1926년 4월 5일 현익철, 양기탁 등에 의해 고려혁명당이 창당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유입될 때 들어왔던 왕청사관학교 출신 김창민이었습니다.

독립군부대 내에 공산주의사상을 유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차광수처럼 김창민도 독립군과 반일애국청년들 가운데 공산주의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김성주가 화성의숙에 다니고 있을 때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였던 김창민은 화성의숙에 와서 며칠 지내면서, 후에 조선혁명군을 창군한 이종락과 박차석, 최창걸 등 공산주의사상을 지향하던 청년들만 따로 불러 모아놓고 자주 회의도 하였고 러시아에서 가져온 책도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화전을 떠나면서 이종락에게 “이번에 나는 누구보다도 열네 살밖에 안된 어린 김성주에게 감동을 먹고 가오. 잘 키우면 우리 공산혁명의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소”라고 말하며 잘 돌봐주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종락을 통해 김성주를 알게 된 김창민은 그 이후에 화요파 선전부장인, 한별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인묵에게 김성주를 소개했습니다. 김창민은 김인묵에게 “한별 동지, 이 애가 바로 김성주입니다. 정의부 계통에서 키운 아이지만 한번 키워볼 만한 아이입니다. 이 애를 추천하니 한별 동지께서 책임지고 이 애에게 반제반봉건 투쟁의 도리와 이론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별 동지라고 불리던 김인묵은 김성주에게 “너는 언제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김성주가 했던 대답은 가관이었습니다.

김성주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친구분들이 공산주의는 나쁘다고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그럴수록 호기심이 동했습니다. 후에 화성의숙에 와서 종락 형님한데 좀 더 자세히 들었고 책도 몰래 읽었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김인묵은 김성주에게 공산당선언에 대해 물었고 김성주는 빨개진 얼굴에 “그냥 읽기만 했을 뿐 아직도 무슨 도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했죠.

결국 김일성은 공산주의란 무엇이며 공산당 선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를 때, 진짜 한별 동지인 김인묵을 만났고 그를 통해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족 출신의 재미교포 작가인 유순호 선생이 300여 명의 당시의 증언자들을 취재하여 쓴 책, 「김일성평전」에는 “한별이란 사람은 이미 진짜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김인묵이었고 김성주는 그로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상세하고 배우게 되었다. 결국 김일성은 자신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쳐준 사람의 명칭까지도 가로챈 셈이다. 정말 이것만 봐도 김일성의 혁명역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왜곡되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김성주가 ‘한별’뿐 아니라 ‘김일성’이라는 이름까지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 김일성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진짜 김일성은 누구인가에 대해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