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

0:00 / 0:00

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의 대남도발은 한반도 전체를 김씨 일가의 영원한 현대판 왕족독재국가로 만들려는 야망에서 남과 북 같은 민족끼리 희생을 초래한 동족상잔의 무장도발이며, 대남도발로 인한 가슴 아픈 희생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1995년 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그러한 적화통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북한 대남연락부가 공작원들을 파견한 사건입니다.

지난 방송에서 저는 1966년에 남파되어 24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다가 1990년 5월에 북한으로 복귀하여 노동당 대남통전부 요직에서 근무했던 이선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당시 이선실을 월북시키기 위해 남파되었던 북한 공작원 김동식은 공작원 박광남과 함께 대한민국 내 고정간첩들과 종북 운동권 활동가들을 지도하고 지원할 목적으로 1995년 8월 29일에 또다시 남파되었습니다.

고정간첩 이선실을 북한으로 데려가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공작원 김동식, 5년 후인 1995년에는 ‘봉화 1호’로 불리는 고정간첩계의 거물을 북한으로 복귀시키는 게 그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나 '봉화 1호'는 이미 국정원에 검거, 포섭돼 '역(逆)공작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 즉 안기부는 북한 대남연락부가 ‘봉화 1호’에게 내려 보내는 지령을 통해 북한 대남공작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고 15년 동안이나 ‘봉화 1호’가 전향한 사실을 감추고 다른 남파간첩들을 체포하고 있었습니다.

전후 북한 대남통전부는 한국에 가족이 있는 월북자들을 훈련시켜 간첩으로 남파해, 그들을 통해 가족과 친척들을 포섭한 후 지하당을 구축하여 대한민국을 허물어보려고 했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월북자들이 연로하게 되자 서울과 말씨가 비슷한 황해도 출신의 청년들을 중앙당 5과와 인민무력부 정찰국에서 선출하여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간첩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나 해외에 파견하는 소위 공작원이라고 불리는 간첩들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이나 외국에 파견되는데, 김동식도 이 대학을 졸업하고 고도의 훈련받은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던 것입니다.

1995년 8월 29일 남파된 김동식과 박광남은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대학가들에서 만연해진 운동권 세력인 주체사상파 성원들에게 접근해 노골적으로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이라고 신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남파공작원 김동식이 쓴 저서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에서 그는 이 사실을 실화로 엮어냈는데 당시 그가 접촉한 운동권 학생 중에는 현재 대한민국의 유명 정치인들인 이인영, 우상호 등 7명의 인물도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1990년 김동식이 남파하여 북한으로 데리고 간 이선실은 북한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한마디로 말하면 거물급 공작원이었습니다. 북한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이선실은 서울에서 정체를 숨기고 간첩으로 활동하면서 남파된 간첩들을 지휘하고 한국 내 북한공작 지도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선실과 함께 북한으로 월북했던 황인호는 북한에서 공작원 훈련을 받고 다시 대한민국에 침투했습니다. 이선실이 간첩활동을 하면서 민중당 대표 김낙중,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호 등 400여 명을 포섭하여 종북성향의 용공분자들을 양성했고 다시 남파된 황인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동생 황인욱과 부인 송혜숙, 주사파 핵심분자인 노점상 최호경 등을 시작으로 400여 명의 조직원을 가진, 지하당조직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에 소재한 만수무강연구소인 만청산연구원에서 근무하던 1990년대에 9.9절이나 당창건기념일인 10월 10일 중앙보고대회에서 ‘남조선 노동당 대표’가 직접 연설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 대에 조국을 통일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북한 대남연락부는 1992년 김일성 생일 80돌을 맞으며 대대적인 대남공세를 강행했으나 그해 95명의 조선노동당 남한지역 간첩망이 드러나 검거됐고 중부지역당 총책인 황인호 등 62명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한국에서 구속되었습니다.

이들은 소위 ‘한민전’이라는 이름의 ‘한국민주주의전선’이라는 단체명으로 위장해 창설된 민중당을 대한민국 제도권 내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정치적 별동대로 만들어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이 집권하면 정치적 지분으로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퇴, 안기부 해체 등 북한노동당의 대남적화통일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끈질기게 활동하였습니다. 조사과정에 국가안전기획부는 “적발된 조선 노동당 중부 지역당 조직원들은 북한노동당 노선에 입각한 규약과 맹세문을 만들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뿌리는 등 반국가, 종북행위를 서슴없이 강행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북한은 경제난으로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민중당 조국통일위원장 손병선에게 공작금으로 한화 3,000만원, 미화 15만 달러를 보내 이 같은 반국가행위를 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1993년 2월 23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1억 7천 2백만 원이 선고되었습니다. 당시 판결문에는 “북한공작원에게 포섭돼 북한노동당에 가입한 뒤 공작금과 권총 등 공작 장비를 전달받고 합법정당인 민중당 안에 친북노선에 따르는 지하지도부를 구축하려 하는 등,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깨뜨리려 한 사실이 인정되는 만큼 사회방위적 차원에서 엄벌에 처해 마땅하다”고 밝혔습니다.

1995년 8월 여수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공작원들인 김동식과 박광남이 이렇게 남한에 창당되어 활동하던 남로당 지하조직이 있음으로 하여 더 유리하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남파된 김동식의 공작임무는 이미 1980년 4월에 남파되어 15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간첩활동을 하고 있던 ‘봉화 1호’와 접선하여 북한으로 복귀시키고 남한의 주체사상파 운동권 주요 인물들과 접선하며 이들을 다시 결집하여 또다시 새로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1995년 9월 2일 간첩 공작선으로 제주도 서쪽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위치한 연평환해장성로 해안가에 도착한 김동식과 박광남은 위조신분증을 이용해 제주도에서 목포로 이동하고 또 목포에서 호남선 열차를 타고 서대전역에 내렸습니다. 지리적으로 대한민국의 중심이며 교통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을 활동거점으로 정한 이들은 대전광역시 유천동과 도마동 일대에 월세방을 얻어 투숙하면서 서구 갑천일대의 도솔산에 북한에서 가져온 총과 탄약을 묻어두고 무전기는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교신하였습니다.

고정간첩 ‘봉화 1호’를 접선하려고 대전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부여 정각사에 도착한 김동식과 박광남은 전향한 ‘봉화 1호’에 의해 대한민국 안기부 요원들이 접선장소에 미리 와서 매복하고 있는 줄을 알 수 없었습니다. 접선장소에서 총격전을 벌인 끝에 박광남은 사살되었고 김동식은 총탄을 맞고 의식을 잃다가 결국 생포되었습니다. 총격전으로 대한민국의 경찰관들인 나성주와 송균헌이 희생되었습니다. 생포되었던 김동식은 전향하여 대한민국 국군 기무사와 국가정보원에서 근무를 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북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북한의 대남도발로 무수히 많은 남북한의 청년들과 국민들이 희생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김씨 왕조는 한마디의 사죄도 없이 여전히 적화통일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