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전 세계는 북한의 7차 핵실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북한의 핵시설과 북한당국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세계 언론들은 “북한에서 핵실험 3번 갱도가 완성됐고 핵실험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가 진행될 10월 16일 이후부터 미국 중간선거가 예정된 11월 7일 사이에 7차 핵실험이 강행될 가능성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고 1992년 4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장조치협정에 서명하고 발효했던 북한이 1993년 3월에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한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였다가 8년 만에 북한이 이 조약에서 탈퇴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조약 탈퇴선언의 재고를 촉구하는 결의를 발표했습니다. 미국정부도 이 결의안을 북한이 받아들여 수차례에 걸쳐 북한과 협의를 진행했으며, 1994년 3월에는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통상사찰을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북한이 신고한 사찰시설명단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작성한, 국제원자력기구의 보고를 전달받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재차 권고했지만 북한은 1994년 6월 13일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도 탈퇴했고 사찰거부를 표명했습니다.
김일성이 핵을 보유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인 1950년 6.25남침전쟁시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45년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의 허황한 꿈을 실현하려던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한반도도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죠. 핵무기의 위력이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에 의해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남침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동족상잔의 살인적인 전쟁개시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전쟁 개시 2달 만에 낙동강 남쪽 부산지역만 남고 북한군에 점령되었습니다.
김일성에 의한 6.25전쟁이 발발하고 중국해방군까지 전쟁에 개입하여 한반도 전역이 김일성의 수중에 넘어갈 위기에 놓이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으로 유엔군이 전선에 투입되었고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1950년 11월 29일에 핵사용을 건의하였습니다. 1950년 11월 30일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한반도에서 공산군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무기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공개했고 북한은 미국의 핵사용 위협을 공갈로 규정하고 핵위협의 부당성을 성토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6.25남침전쟁시기 북한주민들이 핵위협 위기를 느끼고 대한민국으로 월남한 사람의 숫자가 수백만 명에 달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김일성은 핵위협을 느끼고 평양을 떠나 북중 국경지역 만포 시에 위치한 고산진 갱도로 대피하여 숨어살았고, 전후 1954년에 인민무력부 산하에 핵무기 방위부대를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1955년 4월, 비밀리에 원자 및 핵물리학 연구소를 설치하고 1956년에는 소련과 핵연구 협정 및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1955년부터 북한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물리학과 원자력 관련분야 전문가들을 육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1962년 11월 2일 영변지역에 가칭 ‘영변가구공장’으로 불리는 핵연구단지를 조성했고, 1963년 6월에는 소련으로부터 2메가와트(MW)급의 연구용 원자로 IRT-2000을 도입해 1967년부터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핵개발을 하는데 필요한 핵원료를 얻자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야 하고 그러려면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김일성은 핵개발을 위해 평화적인 핵기술 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1973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핵연구 관련분야를 전담할 원자력학부를 신설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대해 강조했고 김일성의 지시로 1978년에는 북한 전역에서 우라늄 탐사가 실시되었으며 1980년에는 영변 핵연구단지에 5MW 원자로가, 1985년에는 50MW 원자로 건설이 착수됐고 한쪽으로는 440MW급 소련형 경수로 원자력발전소 도입이 추진되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핵무기에 들어가는 플루토늄 추출을 시작한 북한은 1989년 9월 15일 프랑스 상업위성 '스폿(SPOT) 2호'에 의해 비밀 핵시설들이 촬영되면서 전 세계에 공개되었고, 마침내 북핵문제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목을 받으면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죠. 동시에 1989년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북한에 지원하기로 약속했던 경수로 원자력발전소 도입이 수포로 돌아갔고, 후계자로 등장해 김일성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김정일은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기 개발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유럽 국가들의 원조로 그럭저럭 인민생활에 필요한 밀가루와 설탕, 생산설비, 연유들을 충당하면서 핵과 미사일개발에 막대한 돈을 탕진해오던 북한은 1990년에 들어서면서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특색 있는 사회주의 구호를 내세우고 시장경제를 도입하였고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이 나라들은 자본주의 진영과의 화해를 도모하였으며 지구촌에는 냉전이 종식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는 달리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현대판 김씨 왕족 국가를 대를 이어가면서 유지하려는 김정일은 “북한의 통치이념인 반미 자주노선을 포기하는 것은 곧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와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역설했고 이것이 북한식 독재국가의 통치기반 약화로 이어진다고 확신하고는 핵실험과 미사일발사시험에 더 광분하였습니다.
김정일은 북한식 정치체제를 우상하며 모방하려던 루마니아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비참한 말로와 독일의 흡수통일을 보면서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고 더 이상 원조나 차관을 받을 나라가 없는 조건에서 체제유지를 위한 출로는 핵보유뿐이라고 확신했던 것이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북한은 이 조약기구에 내재된 구조적 불평등 문제를 지적하며 "비확산체제가 오로지 미국의 입장만을 대변해 왔으며 비핵국가들에 대한 간섭수단으로 이 조약기구를 활용하고 있다"며 시종일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비확산체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은 미신고 핵시설 사찰 거부를 고집하던 북한에 대응해 1993년 초 ‘팀 스피릿 훈련’ 재개를 선언하자 김정일은 3월 8일 ‘팀 스피릿 훈련’에 맞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으며 하반기 들어서는 전군 삭발령까지 내렸습니다.
미국은 1993년 2차례 북미회담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유보, 흑연감속로 포기를 대가로 한 경수로 건설지원을 제안했고 한국과 미국 내부에서도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주장이 교차되면서 북핵 대응상황이 수시로 변했습니다.
1993년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전면적이고 완전한 핵사찰 요구에 맞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를 선언했고 2006년 10월 9일에는 1차 핵실험을, 2009년 5월 25일에는 2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2013년과 2016년, 2017년에 핵실험을 진행하여 지금까지 북한은 6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북한이 7차 핵실험을 강행하려 꾀하지만 ‘불을 좋아하는 자는 불에 타 죽는다’는 속담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