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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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오늘도 전 시간에 이어 호위사령부 사령관 리을설을 통한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리을설은 항일빨치산 시절부터 사령부 전령병으로 김일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온 인물입니다.

2015년 11월 7일, 94살로 사망한 리을설은 평생동안 김씨 일가의 호위를 책임져 왔다고 장담해도 지나치지 않을 흔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12월과 1992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1997년 4월에는 김정일로부터 노력영웅칭호를 수여받아 김일성 빨치산 출신들 중에서 보기 드문 3중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김일성은 1992년 4월 15일 생일 80돌을 맞으며 스스로 대원수 자리에 올라앉았습니다.

김정일도 원수로 리을설은 차수로 각각 승진하였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리을설은 최광과 함께 김정일과 동등한 계급인 원수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이렇게 김정일과 나란히 원수로 추대된 리을설은 보이는 것이 없을 만큼 배짱도 커졌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인 1996년에 호위사령부 사령관 자리에 올라 김정일을 직접 경호하게 되면서 북한에서는 상대할 적이 없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사로잡았습니다.

김일성 생전부터 리을설은 평양의 중앙급 기관들에 나가 강연을 자주 하였습니다. 다른 빨치산 출신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 거동이 불편했던데 비해 리을설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으로도 추정이 됩니다. 김일성 사망 전까지는 주로 김씨 일가 우상화를 위한 강연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만청산연구원에서 근무할 때에도 토요일이면 금수산의사당경리부 대강당에서 빨치산 출신 간부들의 특별강연이 자주 있었는데 그때 리을설도 몇 번 출연을 했습니다. 리을설은 김일성의 호칭에 '위대한 수령'이라는 수사를 반드시 붙였습니다. 당시까지는 리을설이 전하는 항일빨치산시절 김일성의 무훈담을 귀담아 청취했고 그들이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죽고 나서 호위총국장 자리에 오른 뒤부터 리을설의 태도는 급격히 변했습니다.

무엇보다 김일성이라는 이름 앞에 붙이던 '위대한 수령'이라는 존칭어가 사라졌습니다.

마치 빨치산 시절 김일성과 동등하게 대우를 받았던 듯이 자신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리고 빨치산 내부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만청산연구원에서 쫓겨나 양강도의 행정간부로 생활하던 시절 리을설을 더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리을설은 삼지연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김정일을 따라 양강도에 자주 들렸습니다.

양강도 보천군에는 리을설의 조카가 살았는데 인민병원 운전수였습니다. 1999년 한국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북한에 1만마리의 소와 함께 3만여대의 텔레비전(TV), 의료용구급차(엠블란스) 3대를 보냈는데 그 중 2대가 양강도에 배정됐습니다.

한 대는 김정일이 평양산원에 보내주었고 다른 한 대는 김정일의 고향이라고 하는 양강도 삼지연군에 보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대는 리을설의 요구에 따라 김정일이 양강도 보천군 인민병원에 보내주었고 리을설의 조카가 운전하게 됐습니다.

당시 의료용구급차 전달식이 보천군 문화회관에서 열렸는데 리을설이 직접 참가해 축사를 했습니다. 구급차 전달식이 있은 후 리을설은 보천군 문화회관 회의실에서 20여 명이 조금 넘는 도와 군 간부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다행스럽게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김일성을 존칭어도 없이 친구였던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더 나를 놀라게 만든 점은 그때 리을설이 전한 김일성 빨치산의 실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흔히 권력을 가진 자들을 간부라고 부르는데 리을설은 습관처럼 간부들을 관료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한다는 말이 김일성은 워낙 키가 크고 주먹이 셌는데 일제 강점기 길림에서 소문난 조선인 깡패 차광수의 조직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먹을 휘둘러 주변에 하수인들을 긁어모아 차광수 세력으로부터 독립을 하였다고 리을설은 말했습니다. 김일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북한영화 '조선의 별'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다른 진실이어서 손에 땀이 질퍽할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빨치산 출신이라 해도 그런 말까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리을설의 특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2년경으로 생각되는데 리을설은 새로 지은 삼지연 살림집들을 돌아보는 김정일의 현지시찰에 동행했습니다.

이때에도 양강도의 몇 명 안 되는 간부들과 자리를 같이 했는데 그는 양강도 당위원회 간부들 앞에서 "관료는 주먹이 세야 한다, 김일성이 어떻게 김일성이 되었겠냐? 다 주먹이 세서 그렇게 된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김일성의 빨치산이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군들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게 운영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빨치산 시절부터 긴 곰방대(담배대)에 봉건시대 양반들처럼 담배를 넣어서 피웠다고 했습니다.

김일성뿐 아니라 김일성 빨치산의 지휘관들 모두가 곰방대에 담배를 피웠는데 담배를 말 종이가 없어서라기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종이에 담배를 말아 피우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빨치산의 조직체계도 봉건집단처럼 운영됐다고 합니다. 빨치산 대원들이 지휘관들 앞에서 보고를 할 땐 군인들처럼 손을 들어 올려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지휘관들이 김일성을 만나려 해도 먼저 절부터 해야 한다는 게 리을설의 설명이었습니다.

김일성의 빨치산은 다른 의병부대들처럼 상하간의 차별이 심했고 몇 명 안 되는 여대원들은 따로 떨어져 생활을 하면서 남성대원들과 마주치면 얼굴도 쳐다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빨치산 내부에 남녀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속해있던 중국 동북항일연군과 내륙의 국민당 군대나 공산당 부대들과 달리 봉건적인 규율에 철저히 얽매여 생활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중국인 지휘관들을 맞을 땐 꼭 중국식으로 예의를 표했다고 리을설은 언급했습니다.

김일성이 1941년 일제의 토벌에 쫓겨 소련의 연해주 지방으로 도주해 소련군 혼성부대 88여단에서 대위로 복무했습니다. 소련군에서 곽에 든 담배를 공급받게 되면서부터 김일성은 곰방대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리을설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일성의 전우들이라고 하는 김책이나 최현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곰방대를 이용해 담배를 피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방 후 김일성이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는 리을설의 이야기였습니다.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연안파들을 견제하고 북한을 세력권 안에 넣으려는 소련군의 요구로 조국이 해방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귀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리을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 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김일성이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조국이 분단되는 현실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오늘날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적인 봉건 통치는 없었으리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행들을 다시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