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북한의 콘크리트 장벽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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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강연회와 노동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들에서 거짓선전을 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에 와서야 알게 됩니다. 일제의 토벌에 질겁한 김일성이 소만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망쳐 소련군 극동사령부 소속의 88저격여단에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 대위로 근무했다는 사실, 김정일의 고향이 정일봉이 있는 백두밀영이 아니라 소련 하바롭스크지역의 아무르강 유역의 바츠코예(Вя́тское)라는 어촌마을이었고 이름은 김유라로 불렸다는 진실도 대한민국에 와서야 알게 되죠.

그리고 김정은이 김정일의 4번째 동거녀인 재포출신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고영희의 둘째 아들이며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죽기 전까지도 김정은의 존재를 몰랐다는 사실과 그래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는 사실도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남한에서 북침공격을 하기 위해 분계선 전 전선에 걸쳐 콘크리트 장벽을 세웠다는 거짓선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 역시 김정일의 지시로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만들어낸 황당한 거짓이라는 사실을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북한의 가짜 선전인 남한의 콘크리트 장벽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분단되었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세워졌던 장벽이 허물어졌던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은 1961년에 세워졌으나 28년이 지난 1989년 11월 9일에 붕괴되었습니다. 저도 2016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트리어대학에 북한인권 특강을 하러 갔다가 현재 기념으로 남겨놓은 베를린 장벽의 일부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동부독일과 서부독일이 통일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은 유일한 분단국인 한반도에 쏠렸고 북한당국은 대전차 장애물에 대해 ‘콘크리트 장벽’이라며 거짓선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북한에서 6.25남침전쟁을 미군과 한국의 국군이 일으킨 북침전쟁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와서야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승인을 받고 일으킨,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남침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소련제 탱크로 38분계선을 기습 공격한 북한군이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은 북한에서 “미군과 한국 국군이 침략했다”고 배웠지만 3일 만에 반대로 서울이 함락된 사실이 믿겨지셨나요? 저는 북한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에 와서야 김일성이 소련제 탱크를 가지고 전쟁을 일으킬 당시, 한국에는 단 1대의 탱크도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전후에 북한의 탱크에 의한 기습공격을 막기 위해 중부전선 휴전선에 대전차 장애물을 건설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탈북하여 한국에 정착한 지 1년이 되던 어느 날, 저는 북한에서 선전하던 콘크리트 장벽이 궁금하여 같은 회사에 다니는 한국 출신 동료에게 ‘콘크리트 장벽’을 구경하려면 어떻게 가볼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그게 무어냐며 처음 듣는다고 하였고 제가 한국에서 북한의 탱크가 침략해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북침을 하기 위해 만든 장벽이 분계선에 세워졌다는 선전을 북한에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대전차 장애물을 얘기하는 것 같다며 1970년대 말에 북한의 지속되는 대남도발이 가증되자 6.25남침전쟁 때처럼 탱크전으로 침략해올 북한군의 진격로를 막고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차원에서 만든 대전차 장애물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의 길이는 약 238km, 600여 리에 달합니다. 북한에서 선전하는 소위 ‘콘크리트 장벽’인 대전차 장애물은 전선 중부지역에 구축한 탱크방어벽으로 전체 휴전선의 8분의 1도 안됩니다.

북한은 수도 서울 방어차원으로 건축된 대전차 장애물에 대해, 휴전선 전 지역에 설치한 영구적인 분단을 노린 ‘콘크리트 장벽’이라고 설명하지만 북한의 주장대로 240여 km 전 휴전선 구간에 이 장벽을 설치했다면 여기에 드는 시멘트는 80만 톤과 철근 20만 톤, 시멘트 혼합물은 350만 톤이 소요된다는 것이 당시 북한이 선전선동에 사용했던 숫자입니다.

북한의 ‘승리58’ 화물트럭으로 이 시멘트를 운반한다면 동원되는 차량은 무려 27만 대에 달한다고 하니 얼마나 북한의 거짓 선전이 심한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무장지대에 대놓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설자재를 반입한다는 것도 정전 감시를 맡은 중립국 감독위원회나 군사정전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할 것임은 뻔한 사실입니다. 북한은 대전차 장애물을 두고 북침용 군사시설로 선전하기도 했는데 만약 북침할 의사가 있었다면 걸림돌이 되는 이 탱크방어벽 공사에 드는 돈을 현대적인 탱크를 더 생산하여 북침전쟁으로 통일을 이룩하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주장했습니다.

북한이 이 같은 거짓 선전으로 대전차 장애물을 분단의 ‘콘크리트 장벽’이라고 선전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대에 이 군사구조물을 공개하였습니다. 1990년 3월 9일에 동유럽 국가의 언론기자 18명에게 소위 ‘콘크리트 장벽’을 공개한 것입니다. 비무장지대에 설치한 대전차 장애물이 공개되는 그날에 참석한 기자들 중에는 동독 ADN통신의 라이너 쾰러 특파원과 서독 ARD-TV의 로베르트 헤트캠퍼 특파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설치된 구조물을 두고 자유통행 방치 목적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임을 실감했다”고 말했습니다.

남한에 탱크가 한 대도 없었던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은 구소련의 북한 주둔 탱크부대인 소련군 제10전차사단에서 훈련받은 전차병들로 240여대의 탱크를 몰고 남으로 진격했습니다. 1948년에 소련군 제10전차사단이 철수하면서 그 부대가 보유하고 있던 탱크와 포, 군용트럭 등 장비를 인계받아 부대 무장을 갖춘 북한군 제208 전차훈련연대는 추가로 소련으로부터 500대의 탱크를 더 받아 2개의 전차사단으로 확장, 편성하려 했습니다.

6.25남침전쟁을 두 달 앞둔 1950년 4월에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으로부터 청진항을 통해 전차 100대, SU-76 자주포 60문, 트럭 150대를 추가로 지원받은 북한군은 6월 초에는 나진에서 소련군 탱크 T-34를 추가로 더 공급받았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탱크 진격방식은 전선의 한 곳을 집중하여 뚫는 것이 아니라 전선의 여러 곳으로 분산 배치하여 여러 측면에서 진격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결국 1사단 203 전차연대, 4사단 107 전차연대, 3사단 109 전차연대, 105 전차여단으로 분산 배치해 전 전선에 걸쳐 탱크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탱크가 한 대도 없었던 한국군은 발사관이라고 부르는 대전차 화기도 없어 전쟁 초기에는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 인민군은 소련제 탱크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지만 유엔군이 개입하면서 미군 탱크들에게 역전 당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북한 탱크의 기습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북한이 ‘콘크리트 장벽’이라고 부르는 대전차 장애물을 경기도 파주부터 연천을 거쳐서 강원도 철원군에 이르는 곳까지,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의 개활지 곳곳에 구축했습니다.

탱크방어용 장애물을 영구적인 분단을 위한 ‘콘크리트 장벽’이라며 국내외 여론전에 올인하던 북한은 한국보다 길이가 2배가 넘는 콘크리트 장벽을 세웠고 고압 철책선도 설치했습니다. 북한의 고압선으로는 1만 볼트, 6천 볼트, 3천 볼트, 2천 볼트 등 4가지의 고압전류가 흐릅니다. 동서 해안선과 북중 국경선, 휴전선에 이르는 북한의 철조망과 고압전선으로 북한은 하나의 감옥으로 변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인터넷 개방이 안 된 유일한 국가, 북한을 현대판 노예왕국이라고 비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