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혁명소조운동과 기술혁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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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 정권은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사회주의제도가 확립된 이후 당과 국가가 추진해야 할 핵심적인 사업으로 규정하고 그 내용을 구체화하는데 모를 박고 정책을 수립해왔습니다.

사회주의 공업화를 완성하기 위해 기술혁신운동을 힘있게 벌일데 대한 문제는 노동력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북한당국의 주장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8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한 연설문 내용을 통해서도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연설문 중에는 “지금 우리나라의 노력사정은 매우 긴장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나라에서 긴장한 노력문제를 푸는가 못 푸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혁명과 건설을 더욱 전진시키는가 못시키는가 하는 절박한 문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 노력의 긴장성은 매우 엄중한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기술발전으로 노동력을 해결하려는 북한당국의 의지는 당시 3대혁명수행에서 기술혁명에 큰 의미를 부여한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3대혁명수행을 통하여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생산공정의 기계화, 자동화 방안이었습니다.

북한당국은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거치지 않았던 북한상황이 기술진보를 더 촉진해야 할 과업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노동당 출판사에서 출간한 도서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북한당국은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오래전에 이미 산업혁명이 수행되어 공업화가 실현되었고 기계를 가지고 많은 재부를 생산하고 있다면서 노동계급이 주권을 잡고 자본가들에게서 기계와 생산수단을 빼앗아내어 인민의 소유로 만들기만 하면 기술혁명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기술혁명에서 기술혁신운동은 천리마운동의 계승성으로 운운하면서 대중의 지혜와 의지, 집단적 지도를 통한 기술신비주의와 기술무시현상을 극복할 데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앙당 3대혁명소조사업부에서는 3대혁명소조원들의 입당지표로 기술혁명수행을 중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지난기간에는 사상혁명수행을 가장 중시하였다면 80년대에는 기술혁명도 사상혁명 못지않게 중요한 입당지표로 내세우고 담당단위의 기술혁명수행에서 성과를 내도록 유도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3대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었던 1987년에는 이미 많은 대학을 졸업한 3대혁명소조원들이 새기술도입과 창안품제작 등 기술혁신운동을 잘한 것이 평가되면서 입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과학부분을 전공한 사람보다 자연과학부분, 다시 말하여 이공계를 전공한 소조원들이 입당하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를 졸업한 저도 도당에서 배치하면서 관련분야인 협동농장에 파견하였던 것입니다. 강원도 김화군 수태협동농장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3대혁명소조원이 파견된 것이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김화군 수태협동농장은 휴전선에 위치한 농장입니다. 4작업반은 전쟁 전에는 근동리라는 하나의 마을이었는데 전쟁으로 마을이 둘로 갈라져 윗마을은 북한지역으로 되었고 아랫마을이 수태협동농장 4작업반으로 되었습니다. 저는 수태협동농장 농산작업반으로 1작업반과 4작업반, 정자동독립분조를 맡았고 돼지와 염소, 소, 닭, 메추리, 오리 등을 사육하는 축산작업반도 맡았습니다.

북한의 협동농장들은 리단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수태리협동농장 당위원회 초급당비서를 수태리 리당비서라고 불렀습니다. 관리기구는 당과 행정으로 나뉘는데 정책적인 문제를 다루는 당기구인 리당위원회에는 리당비서와 부비서, 리당지도원이 있으며 문화회관 관장과 적위대 대장, 농근맹위원장, 사로청위원장 등이 당위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급일꾼들로서 농사일을 하지 않고 오직 당과 근로단체와 관련된 일들을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기술혁명과 관련된 당정책 집행은 리당비서와 부비서, 리당지도원이 담당하였습니다. 3대혁명소조원들은 리당위원회에 기술혁명수행정형에 대한 보고를 제출하도록 건의하기도 하였고 진행이 잘 안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상부에 제출할 보고문을 만들어 당일꾼들을 압박하기도 하였습니다. 기술혁명에 대한 행정적인 책임은 협동농장 관리일꾼들에게 있었습니다. 매 작업반들에는 기술지도원이 있으며 협동농장에는 기사장이 모든 기술혁명수행에 대한 행정적인 총괄을 합니다.

그런데 담당단위들에서는 기술혁신을 하면 그에 따른 노력예비가 반영되어 자칫하면 작업반 노력이 증감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협동농장에는 농기계작업반이 있으며 새로운 농기계를 제작하는 일은 이곳에서 진행하게 됩니다. 만약 이곳에서 기계식 모이양기나 원동력을 이용한 제초기 등 새로운 농기계들이 제작되어 보고되면 중앙으로부터 그만큼 농기계를 배정받는데서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협동농장들에서는 새로운 농기계제작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저도 4작업반에서 새형의 이동식강냉이탈곡기 제작을 발기하였는데 작업반에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수작업으로 건조장에서 말린 강냉이알을 떼내는 작업은 손바닥과 손가락이 다 터갈라지는 것은 물론 시간도 많이 드는 중노동에 속합니다. 그래서 원산농기계공장에서 새로 제작한 이동식 강냉이탈곡기 설계도면을 구입하여 제작하려 했지만 현장에서는 철판은 물론 용접봉이나 전동기, 피대 등 모든 부품이 없다며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작업반장과 기술지도원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군당 3대혁명소조사업부에 반영할 보고문을 만들어 상부에 제출하기 전에 리당비서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날로 리당비서가 작업반장과 기술지도원을 불러들여 비판서를 씌우며 난리를 쳤습니다. 작업반 일꾼들의 당중앙의 기술혁명방침에 대한 불건전한 태도는 리당위원회에도 불통이 튈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리당비서의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작업반장이나 기술지도원은 조건타발만 하면서 여전히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재구입의 어려움이 가장 큰 구실로 제기되었고 결국 작업반장에게 강냉이와 들깨 등 농작물을 제공받아 원산에 가서 비법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달 만에 탈곡기가 만들어져 현장에서 사용하게 되면서 작업능률도 나고 작업반 농장원들도 성수가 나는 듯 했지만 한쪽으로는 불만이 커갔습니다. 전기 전압이 낮으면 기계가 돌아가지 않아 다시 수작업을 하여야 했고 전기가 정상전압이 들어오면 그 시간 동안은 기계를 돌리느라 담배를 피울 새 없이 작업에 내몰렸습니다.

작업장에서 모여서 수작업으로 느슨하게 일하면서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누던 분위기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능률은 났지만 공수는 기계에게 돌아가고 분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도 불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입당을 하자면 기술혁신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저로서는 축산작업반에서 ‘짚신나물에 의한 새끼돼지설사증 치료약 제조’, ‘돼지고막천공기’를 제작하여 도입하였습니다. 돼지고막천공기는 러시아에서 연구된 자료를 인민대학습당에서 보고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공기압축식 돼지고막천공기는 권총식 모양에 압축공기가 순간적으로 나가면서 돼지고막을 터쳐놓는 기계입니다. 돼지가 놀라서 자다가 깨나면서 증체율이 낮아진다는 연구자료에 따라 고막을 터쳐서 듣지 못하게 하여 잠을 충분히 자도록 한다는 것이 이 기계제작의 과학적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귀를 못 듣는 어미 돼지가 자기 몸에 깔린 새끼 돼지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해 압사하여 죽이는 일들이 빈번해지면서 불만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중앙의 기술혁명방침관철이라는 이름을 내건 3대혁명소조원들의 기술혁신운동은 입당을 위한 야심에 곁들어져 지속되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3대혁명소조의 기술혁명수행에서 극치에 달했던 전국3대혁명소조로봇전시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