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이한영 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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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여러분, 조선왕조시대이씨 왕자들사이의권력을둘러싼왕자난이지금 북한의 김씨왕조에서도그대로일어났다는사실은이미지난방송들에서설명해드렸습니다. 세종대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7대왕인 세조로 되는 과정에 수많은 봉건고위관료들을 숙청한 것과 같은 일이 오늘날 김씨왕조에서는 김정은이 권력의 경쟁자인 장성택과 그 세력을 처형함으로써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5년 전인 지난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은의 지시로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성혜림의 아들이자 김정은의 배다른 형인 김정남이 독극물 테러로 사망한 사건은 현대판 김씨왕조의 왕자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의 권력쟁탈을 위한 살인 기질이 아버지 김정일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인 기질이라는 사실은 김정일이 자기의 처조카인 이한영을 암살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 씨 암살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암살사건을 말씀드리기 전에 청취자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김정일의 부인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재학시절에 대학동창인 홍일천과 동거하여 딸 김혜경을 보았고 그 뒤로 1969년에는 영화배우 성혜림과 동거해 아들 김정남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의 정식 부인은 김일성의 타자수였던 김영숙이었습니다. 김일성의 승인 하에 결혼식을 올렸기에 김영숙을 김정일의 본처라고 보고 있죠. 홍일천과 성혜림은 결혼 전에 몰래 동거하면서 딸과 아들을 본 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홍일천, 성혜림 이후 세 번째 만에 본처인 김영숙을 만나 결혼식을 치르고 두 딸인 김설송과 김춘송을 낳았지만 그 뒤에도 그의 여성행각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여인인 성혜림은 김정일이 김영숙을 만나 살면서 또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와 동거하는 것을 보면서 정신병으로 모스크바에서 치료받다가 2002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또한 재일귀국동포 출신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였던 고영희와의 동거 과정에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형제가 태어났고 고영희도 유선암으로 사망하면서 그 이후에 김정일은 20살 연하인 김옥과 동거하다가 결국 2011년에 급사하였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한영은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인 성혜림의 조카입니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인 이한영은 김정일이 자기의 이모를 뒤로한 채 김영숙과 고영희 등 다른 여자들과 동거하면서 자녀들을 낳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왕자의 난을 직감하고 망명을 결심하였습니다.

1961년생인 이한영은 8살 나던 1969년에 영화배우였던 이모가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으로 15호 관저에 들어가면서 김정일과 가까운 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성혜림은 김정일보다 나이가 5살이나 많았고 이미 결혼하여 딸 이옥돌을 둔 유부녀였지만 김정일은 성혜림을 강제로 이혼시키고 함께 살았습니다. 성혜림이 아들 김정남을 낳게 되면서 언니인 성혜랑이 동생의 산후 몸조리를 하기 위해 관저에 들어가면서 아들인 이한영도 함께 김씨왕조의 저택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주민들에게는 북한 영화 이외의 다른 나라 영화들을 보거나 유포하는 것을 통제하면서도 영화광인 김정일은 남한 영화와 드라마도 매일 보다시피 했고 함께 같은 관저에서 살았던 당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도 남한과 미국 등 자본주의 나라 영화와 드라마들을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에서 “관저에서 남조선 텔레비전과 영화를 많이 본 탓에 남조선이 내게는 아주 친근했다, 당시 남조선 영화는 야하고 짜릿한 장면이 많았다, 미국 영화도 많이 봤다. 특히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가 주연한 러브스토리는 가슴 뭉클하고 진한 감동으로 인해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이 한국에서 학생들과 주민들이 흔히 쓰는 영어 외래어인 ‘디자인’, ‘드라마’, ‘프로포즈’란 말을 쓰는 것을 들으면서 ‘김정일도 남조선 영화를 많이 보니까 그런 말을 쓰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그 이후에 모스크바에 유학을 나온 기회에 제네바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 이모가 모스크바에 있어도 북한 보위부의 감시를 받고 있기에 남한에 와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았습니다.

김정일의 처조카라는 배경으로 북한에서 호화생활을 했던 그였지만 남한에서의 그의 14년 은둔생활은 외로운 삶의 연속이기도 했습니다. 부자의 꿈을 안고 건축업이라는 큰 사업을 벌였고 사업실패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만난 예쁜 아내와 딸자식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한양대학교 재학 중이었던 1987년 12월부터 KBS 방송 제작 책임자인 PD로 일하였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건설업체를 차리고 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외국으로 망명하자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을 1996년 여름과 가을에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발간했습니다. 그의 저서는 출간되자마자 유명세를 탔습니다. 자신의 이모 성혜림이 김정일의 부인이 된 과정과 김영숙과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 등 다른 여자들과의 이색적인 성관계 실태도 적나라하게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와 장성택의 러브스토리,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 김일성 사이의 이성적인 관계와 김일성의 간호사가 낳은 장현이 김일성의 모색과 너무도 닮아서 알고 보니 김일성의 아들이었다는 사실도 저서에 밝혔습니다.

김정일이 김정은의 생모인 네 번째 여자 고영희와 동거하면서 둘째 부인이었던 성혜림이 모스크바에 가게 되었고 결국 언니인 성혜랑과 조카였던 이한영도 모스크바로 따라가게 되었던 과정도 구체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한영은 1997년 1월 10일부터 서울의 여러 백화점들에 초콜릿을 판매하는 업체를 만들어 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한쪽으로는 그의 저서가 유명세를 타면서 잘 팔렸기에 건설업체를 운영하면서 졌던 빚도 갚고 경제적으로 안착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처조카인 이한영이 쓴 저서에 들어있는 내용들이 지금까지 숨겨왔던 김씨 일가의 추잡하고 반인민적인 행위들을 폭로하는 도서라는 이유로 이한영을 암살할 지시를 내렸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파견된 암살조는 1997년 2월 15일 밤 9시 52분경에 이한영이 퇴근하는 시간에 집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권총으로 암살했습니다.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의 공작원들인 조장 최순호와 윤동철은 사건발생 한 달 전에 위조여권으로 중국을 통해 남한에 입국했고 2월 15일 밤 이한영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량을 대기시킨 이후 미리 14층에 올라가 대기하였으며 이한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함께 북으로 가자”고 협박했습니다.

북한 남파 공작원 윤동철이 이한영을 뒤에서 잡고 최순호는 코트 안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10cm가 약간 넘는 크기의 벨기에제 권총으로 머리와 가슴에 2발을 쐈고 결국 이한영은 병원에 실려 갔으나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씨 왕조와 너무도 닮은 북한의 현대판 김씨 왕조의 숙청정치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은 희생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