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카륜회의’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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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장 제목이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입니다. 이 4장 내용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내용은 김일성 즉 과거의 김성주가 길림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구상했다는 ‘조선혁명의 진로’를 실천할 첫 단계로서 당조직을 결성했다는 것과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첫 무장투쟁 대오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했다는 주장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자신의 혁명활동 업적으로 크게 자찬하고 있는 카륜회의의 허구에 대해 역사적인 자료들을 통하여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중국 장춘의 북쪽에 있는 카륜에서 열렸다는 일명 카륜회의는 1970년대 이전에는 북한의 그 어떤 도서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 치고 카륜회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 회의를 중시하면서 혁명역사 과목에도 가르치고, 대학입시시험에도 나올 정도로 강조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김씨 왕조의 정통성을 주민들에게 철저히 세뇌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지난 6월 30일, 카륜회의 93돌을 맞으며 노동신문 2면에 ‘혁명의 절대적 진리-자주는 생명이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에는 ‘암담하던 민족 수난의 시기 참다운 혁명의 길, 올바른 투쟁의 진로를 찾지 못해 우리 민족은 참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했지만 일찌기 혁명투쟁에 나선 첫 시기에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고 민족해방투쟁을 승리에로 이끌려면 새로운 지도사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절감한 김일성이 카륜회의에서 우리민족이 나아갈 진로를 내놓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이런 투철한 자주적 신념을 지니고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카륜에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역사적인 보고를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가 김일성의 회고록을 보면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무슨 사건을 다룰 때 당시 사람들의 이름이나 가족형편 등을 상세히 나열하면서 역사적 신빙성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장 3절 카륜회의 서두에서도 김일성은 소년탐험대 총대장 정행정이 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느니, 진명학교 교원 장소봉의 집에서 묵었는데 부부싸움이 잦았다느니 하는 지나치게 세세한 정보를 나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역사자료를 찾아보면 ‘소년탐험대’라는 조직은 어떤 기록에도 없으며 총대장 정행정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도 없을 뿐더러 장소봉은 동아일보 지국장까지 했다고 하지만 그 역시 아무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북한 도서들 마저도 1970년대 이전에는 카륜회의에 대한 기록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김일성과 추종자들은 일제강점기 살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 하나, 둘 사망하고 살아있는 사람들마저 점차 기억이 희미해지는 틈을 타서 이런 거짓 역사 꾸미기에 주력했던 것입니다.

카륜회의는 북한에서 1971년에 출간한 도서 ‘역사사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카륜에서 발표했다는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연설에 대한 선전도 그 이후에 나왔습니다. 심지어 카륜회의에서 연설하는 김일성의 모습이 담겨진 거짓 미술작품까지 버젓이 등장하였습니다.

저도 북한에서 살면서 이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대한민국에 와서 인터넷과 역사도서들을 보면서 이것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연설 제목과 연설 전문 내용이 북한에서 처음 공개된 것은 1979년에 출간된 ‘김일성 저작집’에서부터였고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1980년대에 출간되기 시작한 ‘조선전사’에서부터는 역사적 사실로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1990년대에 들어와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카륜회의 연설을 통해 주체사상에 입각한 자주적인 당창건방침과 항일무장투쟁노선을 제기했다고 하였습니다.

1970년 이전까지도 없던 ‘무장투쟁 노선 제시’라는 표현은 1971년에 출간된 ‘역사사전’에 처음 등장했고 당 창건을 운운한 표현도 1982년 4월 김일성의 출생 70돌을 계기로 내용이 추가된 ‘김일성동지 혁명역사’ 교재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면 카륜회의에서 김일성이 했다는 연설 ‘조선혁명의 진로’의 허구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이 연설문은 크게 3가지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조선혁명의 성격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제반봉건 혁명’이라는 표현은 1920년대 중국 공산당과 조선 공산당의 당 활동 강령 내용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당시의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에 대해 말한다면 1920년대 말에 창건한 국민부 산하 독립군 조직인 조선혁명군 제9대 대장이었던 이종락의 심부름이나 하던 김일성 즉 당시 18살의 김성주는 조선혁명을 거론하는 큰 회의를 자신이 직접 조직할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30년 7월 초, 조선혁명군 대원으로 입대하였다가 그 후에는 중국 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 연군에 입대하면서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다는 것이 당시 김성주와 함께 생활했던 목격자들의 증언입니다.

1921년 7월 중국 상해에서 창당된 중국 공산당은 반제, 반봉건, 인민민주독재 등의 계급투쟁강령을 내세웠고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 공산당은 1926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일본군과 헌병, 일본경찰을 조선에서 철폐하고 전인민이 절대평등의 권리를 가질 것을 주장하는 반제반봉건 투쟁노선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카륜회의’에서 18살 앳된 김성주가 반제반봉건 투쟁 노선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는 것은 황당한 궤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연설의 두번째 내용은 ‘카륜회의’에서 처음으로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것입니다. 1930년 7월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하다가 1940년대 일제의 대토벌에 겁에 질려, 임신한 김정숙을 데리고 소련으로 도망쳐서 소련붉은군대 극동군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으로 복무한 김일성, 그가 18살에 주체사상에 대해 강조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주체사상은 김정일이 1970년대 후계자로 등장하여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에서 근무하면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을 제시하면서 북한에서 대두되었던 이데올로기입니다.

제가 북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상학습을 할 때 주체사상대신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강조했고 김일성광장 중심 내각종합청사 건물 외벽에 지금의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 대신에 마르크스-레닌의 초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 역사사전에서도 카륜회의에 대해 처음 언급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하여 조선혁명의 진로를 밝혔다고 하였지만 1980년대 이후로는 주체사상을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는 역사 왜곡에 이골이 난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 밖에 할 수 없는 짓입니다.

회고록에서 김혁에 의해 잡지 ‘볼셰비크’가 간행되었다고 했지만 당시 이 잡지는 1920년대말 서울에 조직된 공산주의 조직인 상해파의 기관지였으며 당시 카륜회의에서 김일성이 했다고 하는 연설문 ‘조선혁명의 진로’가 이 잡지에 실렸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거짓으로 왜곡된 도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거짓이 드러나고 진실이 밝혀지기는 것이 두려운 김씨 왕조는 지구상의 거의 유일한 인터넷 폐쇄 국가로 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