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역사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대부분 역사왜곡으로 가득 찬 허구성이 짙은 도서입니다.
21세기인 오늘날, 봉건왕조 독재국가와 똑같은 방식의 국가권력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는 북한이 유일합니다. 김씨일가처럼 대대로 권력세습을 하는 북한의 암담한 현실에 전 세계는 경악을 금치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김씨왕조의 영원한 계승을 위해 우상화 선전선동에 모든 집중을 하다보니 저들 선대 족속들에 대해서는 위대한 인물로 왜곡하면서도, 우리민족 역사에서 김일성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세기와 더불어 6장 시련의 해, 3절 기쁨과 슬픔에서 김일성이 안중근 열사에 대해 과소평가한 내용은 너무도 억이 막힌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 중국공산당을 따라다니며 비적행위를 일삼다가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따르던 김일성 그리고 일제의 토벌에 질겁하여 소련으로 도망쳐서 5년 동안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하였던 그는 회고록에서 자기의 목숨을 서슴없이 바쳤던 안중근 열사를 비하할 자격마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일성이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해방 후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을 등에 업고 귀국하여 북한 지도자가 되었던 사실은 이젠 비밀이 아닙니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남만원정을 마치고 유가분방이라는 마을에서 중국인 노인 여수문과의 대화를 통해 안중근 열사를 언급한 내용을 상기시켜보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회고록에서 나오는 김일성, 당시 김성주와 여수문 노인과의 대화내용이 기억나리라고 봅니다.
밖에서 쉬고 있는 김일성을 찾아와 “성주 선생이 나하고 생판 모르는 남남이라면 몰라도 우리야 구안도에 있을 적부터 서로 낯을 익혀온 사이가 아닌가”라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여수문 노인, 그 대화 중에 나온 “조선의 열사들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위인은 안중근 열사”라는 노인의 말에 김일성이 한 대답은 어찌 보면 질투가 깔린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안중근 선생이야 말로 동양의 거인이지요. 오죽하면 원세계 대총통까지 그의 의거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겠나요”라고 말하자 김일성은 “노인님은 조선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안중근을 그리도 잘 아십니까?”라고 되물었죠.
노인은 다시 “만주에 사는 사람치고 안중근을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오죽하면 하얼빈역에다가 안 열사의 동상을 세우자고 말한 사람까지 있었겠나요. 나는 지금도 자식들에게 혁명가가 되겠거든 손중산 선생과 같은 혁명가가 되고 대장부가 되겠거든 안중근과 같은 대장부가 되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김일성에게 “이왕이면 부대를 무은 바엔 관동군 사령관과 같은 거물들을 요절내지 못합니까?”고 물었고 김일성은 “그까짓 관동군사령관이나 하나 없애 버려서 무엇 하겠습니까? 이등박문을 죽이면 새로운 이등박문이 나오듯이 혼죠를 죽이면 새로운 혼죠가 또 나올게 아닙니까, 테로(테러)만으로써는 큰일을 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었고, 그 말에 탄복하여 여수문 노인은 김일성에게 참으로 훌륭하다며 안중근 같은 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부대를 직접 창건한 적도 없으면서 반일인민유격대, 조선인민혁명군, 항일유격대니 하면서 무슨 부대를 창건했다는 것도 역사왜곡이지만 일제의 대토벌에 피해 도망치고도 안중근 열사를 과소평가한 김일성의 이 대화내용은 황당스런 궤변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1979년에 개봉된 북한 조선예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2부 마지막 장면에서 안중근 열사가 교수형에 처하기 전에 나오던 대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나를 옳게 이끌어줄 그런 위인 그런 영웅은 없었구나. 5천년의 역사를 가졌으나 짓밟히고 천대받는 우리 민족을 구원해주고 세계에 당당히 내세워줄 그런 절세의 위인을 한번 만나보았으면, 아 그런 영웅은 언제면 나타날려는지...”
결국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안중근 열사를 위인이나 영웅이 아닌 극단적인 테러분자로만 묘사했고 김일성의 등장으로 일제 패망과 조선독립의 서광이 열리게 되었다고 영화에서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가르쳐 주지도 않아 북한주민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안중근 열사의 위대성에 대해 저를 비롯한 탈북민들은 한국에 와서야, 그가 김일성보다 수천 배나 더 위대한 애국열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일제의 침략을 막기위해 국채보상운동과 민족학교 설립에 힘쓰셨던 애국선비 안태훈의 아들로 태어난 안중근 열사는 26살되던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는 것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삼흥학교를 세우고 후대교육을 통해 반일항쟁을 벌리려던 안중근 열사는 1907년 일제에 의해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무장투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의병대에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국외에서 독립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의병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08년 7월에는 대한의군 참모총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09년에는 11명의 동지들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다 바칠 각오로 왼손 약손가락 한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등박문 즉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자 안중근 열사는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M1900 반자동권총으로 사격하고 가슴 안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올리며 “까레야 우라”를 3번이나 외쳤습니다. 러시아어로 “까레야 우라”는 “조선 독립 만세”라는 뜻입니다.
북한에서는 안중근 열사의 애국적인 업적과 기상을 숨기려고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체포된 후 옥중투쟁을 한 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지만 그의 애국적인 소행과 담대한 사나이의 풍격은 일제토벌에 겁에 질려 소련으로 도망친 김일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즉시 병원으로 후송하기 위해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저격 당한지 30분만에 사망하였고 안중근 열사는 체포된 지 110일이 되던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40일이 지난 3월 26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으로 3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안중근 열사의 이토 히로부미 총격사건은 김일성이 세상에 출생하기 2년전 일이었고 김일성은 안중근 열사와 같은 나이였던 1940년대 초반기 5년 동안은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도망쳐서 소련군에 복무하였습니다.
재판정에서 일본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가 심문하자 안중근 열사는 “1905년 강제침략조약인 늑약조약 체결, 조선의 산림과 광산, 철도, 어업, 농상공업 등을 늑탈한 죄, 국채 일천삼백만원을 조선에 강제로 지게 한 죄, 학교 내 서적을 압수하여 불태우고 애국봉기를 폭도라며 쏴 죽이고 살육한죄, 매국노들을 앞세워 보호통치의 정당성을 운운한 죄 등 15가지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고발하였습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오직 김씨왕조의 영원한 계승과 봉건왕조독재권력 유지를 위해 황당한 역사왜곡을 나열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그래서 거짓역사도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이런 역사왜곡을 끝장내려면 인터넷의 완전한 개방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