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천도와 북한의 수도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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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고려시기에는 '서경'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려말기 1135년에 승려 묘청세력이 당시 수도였던 개경에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나 반대세력에 의해 저지당하면서 결국 서경천도의 꿈은 실현할 수 없었죠.

오늘 방송에서는 고려말기 승려 '묘청'에 의해 개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던 서경천도에 대해 그리고 지금의 평양이 김씨왕조의 영원한 세습을 위한 특수지역으로 변모된 데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수도가 개경으로 정해지면서 평양은 서경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고려시기에 수도인 개경, 오늘날의 개성에서 평양인 서경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고려 3대왕인 정종왕이 서경천도를 추진하면서 평양성을 쌓게 했지만 죽으면서 무산되었고 12대왕 인종왕 시대에도 승려 묘청과 정지상 등에 의해 서경천도가 추진되었죠.

오늘 얘기해드릴 고려 중엽에 발생한 서경천도를 주도한 묘청(妙淸)은 중의 신분인 승려출신이었지만 고려봉건정부의 지배층을 흔든 인물입니다. 묘청은 고려왕조와 조선시대 이조왕조시기에는 반란의 수괴자로 알려졌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에 의해 재조명되었습니다.

신채호는 묘청과 서경천도에 대해 "서경 전투에서 봉건정부군과 반란군 병력 수가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되지만, 그 결과가 우리역사에서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승려 묘청이 등장한 고려 인종 시대는 고려사회가 내우외환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귀족세력을 대표하던 문신 이자겸과 무신 척준경이 일으킨 이자겸의 난으로 고려왕권이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고려시대에 문벌귀족들이 혼인을 통해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는데 이자겸도 딸들을 고려16대 예종왕과 17대 인종왕의 왕후로 들이면서 이자겸의 권세는 왕권을 능가하는 실세로 군림할 지경이었습니다.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은 그 일파의 제거로 막을 내렸지만 그 과정에 궁궐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문벌귀족들 사이의 분열과 대립이 심해지면서 1135년에는 '묘청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혼란의 시기에 일어났던 묘청의 서경천도는 수도 개경에서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것이었습니다.

승려출신 묘청에 의해 일어난 묘청의 난의 최대의 이슈인 서경천도는 풍수와 도참사상을 바탕으로 한 '수도이전운동'이었습니다. 통일신라 말기를 거쳐 고려시대에 만연했던 도참사상(圖讖思想)은 앞날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입니다. 고려시기에는 도참사상으로 왕실의 운수도 점치곤 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도 도참사상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그는 말년에 후손들을 경계하는 훈요10조(訓要十條)를 지었습니다.

훈요10조의 제5조에는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인 까닭에 만대(萬代)의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중간 달마다 순주(巡駐)하여 머물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처럼 고려시기 개성은 쇠퇴되어 서경이라 불리던 평양이 새로운 왕실의 부귀를 위한 지역으로 알려지면서 정종 때에도 도참사상에 따라 서경 천도가 결정되어 토목공사를 하다가 왕의 죽음으로 그만두게 되었고 인종왕 시대에는 서경천도가 강행되었던 것입니다.

서경천도를 주도한 승려 묘청은 서경의 승려로서 정심(淨心)이라는 불렸던 인물입니다. 인종왕이 권력을 잡은 지 10년이 되던 1132년에 왕의 장인이었던 이자겸이 일으킨 난으로 수도 개성에 있던 고려 정궁(正宮)인 만월대(滿月臺)가 불타서 재건 기초공사를 할 때 묘청은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라는 병가압승의 술책을 부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법은 일찍이 선사 도선이 강정화에게 전해준 것인데 강정화가 다시 나에게 전하였고, 나는 뒤늦게야 백수한을 만나서 그에게 전해주게 된 것이니,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하는 술법이다" 이것은 묘청 일파가 왕궁을 개성에서 평양으로 옮기자는 서경천도의 구실을 만든 시작이었습니다.

묘청은 인종왕에게 "신 등이 보건대 평양의 지세는 풍수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에 해당하옵니다. 전하께서 만약 그곳에 궁궐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얻을 수 있으며 금나라도 조공을 바쳐 스스로 항복할 것이고 36국이 모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1128년(인종 6년) 8월 23일, 묘청의 서경천도에 응수해 평양으로 행차한 인종왕은 지금의 평양시 용성구역 용추1동에 대화궁(大花宮)이라는 이름을 단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명하였습니다. 왕궁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불과 3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인종왕이 새 궁궐의 건룡전(乾龍殿)에서 신하들의 하례(賀禮)를 받게 되었습니다.

묘청일파는 인종왕을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자는 칭제건원( 稱帝建元)을 제안하기도 했고 고려에 위협을 주던 주변국인 금나라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금국정벌도 주청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묘청일파를 서경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경천도를 내세웠던 서경파와는 달리 이를 반대한 개경파들의 역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종왕도 서경파의 서경천도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자겸 난이 일어났고 왕궁마저 불타버린 개경 땅이 싫어졌고 묘청일파인 서경파들의 새로운 정치적인 혁신을 표방한 '혁구정신(革舊鼎新)'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종왕은 1134년 1월에 승려 묘청을 삼중대통(三重大統) 지루각원사(知漏刻院事)라는 벼슬자리에 임명하였고 2월에는 다시 평양으로의 신궁 행차를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들은 묘청일파의 서경천도를 반대해 나섰고 이에 맞서 서경파는 1135년 정월 평양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승려 묘청과 그 일파는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군사의 명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렇듯 국호와 군사를 갖춘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었으나 묘청이 왕이 될 욕심은 없었습니다. 묘청일파의 대립대상은 왕이 아니라 서경천도를 반대하는 개경의 귀족들이었습니다. 묘청의 서경파의 거사는 이자겸의 반역을 꾀한 사건과는 달리 새롭고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서경파의 거사 소식이 알려지자 인종은 봉건정부군을 파견하도록 지시했고 토벌대 대장으로 된 김부식은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김부식은 "서경(평양) 사람들도 모두 내 아들 딸들이니 우두머리만 죽이고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 마라"고 당부했습니다.

김부식의 대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에 서경파 군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내부에서 배신과 분란이 일어났으며 결국 묘청의 심복인 조광이 묘청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조광이 상전의 목을 베면서까지 투항할 의사를 밝혔으나 항복해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광은 결사항전으로 맞서 싸웠으나 정부군의 총공세에 결국 불속에 뛰어들어 자결을 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는 새로운 시대를 바라던 고려시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료들과 백성들의 항거로 이어졌지만 끝내 실패하였습니다. 지금도 평양에는 새로운 것을 꿈꾸었던 서경파들의 피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김씨왕조를 반대하여 일어났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투서사건, 소련 푸룬제 군사아카데미사건, 6군단사건 등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여 일어났던 반정부, 반국가 항쟁의 씨앗은 그대로 봉화가 되어 현대판 봉건독재국가인 북한체제의 붕괴를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