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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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에서는 영화를 크게 조선예술영화와 기록영화, 아동영화로 나눕니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에 따라 혁명영화, 시사영화, 문헌영화, 과학영화 등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이 영화들 중에서 당연히 가장 중요시 되는 영화가 혁명영화입니다. 북한당국은 지난 2017년 2월 26일에 ‘혁명영화창조에 깃든 불멸의 업적 길이 빛나리’라는 제목의 노동신문 기사를 통해 혁명영화를 중시하는 이유와 창조과정, 그 중요성 등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김씨 일가의 우상화 세뇌선전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혁명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967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혁명영화라는 말은 들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에서 선전선동사업을 맡아보면서 그때부터 ‘혁명영화’ 창작사업이 시작되었고 혁명영화라는 용어가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967년 당시 부수상이었던 박금철 등 국내파 종파숙청을 계기로 김일성에 대한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지배체제가 강조되면서 선전선동분야에서 김일성 우상화선전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당국이 혁명영화 창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백두산창작단을 1967년에 설립한 것도 우연한 일치가 아닙니다. 당시 김정일은 “아직 우리나라에 수령님을 형상한 영화가 없다”며 “앞으로 자신이 수령님을 형상한 영화를 만들어 그의 위대성을 만대에 길이 빛내이겠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처음 만들어진 영화가 ‘유격대의 오형제’입니다. 이것은 항일혁명투사 오중흡과 그 일가들의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수령의 위대성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백두산창작단 창작가들은 처음 이 영화를 3부작으로 만들어 제목을 ‘형제들’이라고 달아 김일성에게 올려보냈습니다. 이 영화를 본 김일성은 “내가 바라는 영화가 바로 이런 영화”라고 치하해주었고 며칠 뒤에는 다시 창작사에 영화제목을 ‘유격대의 오형제’로 고치고 내용도 더 수정하여 전체 인민이 다 보도록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영화는 우리 당의 힘있는 직관적인 선전선동 수단”이라며 “영화는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여줄 수 있으며 비교적 짧은 시간에 오랜 기간의 역사적 사실들과 사건들을 직관적으로 생동하게 보여줄 수 있으므로 근로자들을 교양하는 데서 소설이나 신문보다도 낫고 무대의 제한을 받는 연극보다도 우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예술형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힘있는 대중교양 수단”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영화예술의 정치화, 우상화가 극대화되는 시기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북한당국은 백두산창작단의 ‘유격대의 오형제’ 재수정 창작과정에 김정일의 영도가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김정일은 촬영현장에 나가서 배우들에게 ‘대본 100번 읽기 운동’ 등 창작과정에 크게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북한당국은 이를 현명한 영도라는 표현으로 극찬하기도 합니다.

1969년에 혁명영화 ‘유격대의 오형제’가 완성되자 김정일은 그 다음으로 영화 ‘피바다’를 창작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정일은 1969년 9월 16일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일꾼들에게 불후의 고전적 명작을 영화로 옮기는 사업에 총역량을 집중하도록 조직정치사업을 짜고 들것을 지시하였고 백두산창작단에 영화화면에 김일성의 영상을 등장시켜 우상화선전을 극대화할 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였습니다. 김정일은 1970년 1월 19일에 백두산창작단 창작가들에게 불후의 고전적 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 창작에서 사상적 알맹이는 자위단에 들어도 죽고, 들지 않아도 죽는다는 것이라면서 영화에서 이 사상적 핵을 두드러지게 형상하는 데 초점을 두라고 강조하였습니다. 1970년대는 불후의 고전적 명작들을 영화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되어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파는 처녀’ 등이 창작되어 보급되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1977년에는 처음으로 김일성 일가를 형상한 첫 혁명영화인 ‘누리에 붙는 불’이 창작되었습니다. 1977년 5월 2일 노동신문에는 혁명영화 ‘누리에 붙는 불’에 대해 “항일투쟁을 영도한 수령님의 영상을 화폭에 정중히 모시고 견결한 공산주의 투사들인 김형직동지와 강반석여사, 김형권동지의 혁명활동을 형상한 영화”라며 “모든 당원과 근로자들을 힘있게 고무 추동하는 참된 교과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혁명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시작으로 그때부터 김일성과 그 일가들을 형상한 배우들인 ‘1호 배우’가 생겨났고 연이어 ‘1호 영화’들이 창작되어 보급되었습니다.

1977년 혁명영화 ‘누리에 붙는 불’에 이어 1978년에는 혁명영화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1980년에는 혁명영화 ‘백두산’이 창작되었습니다. ‘누리에 붙는 불’은 김일성의 부모와 삼촌 등 손위의 부모세대를 다룬 영화라면 혁명영화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는 김일성의 동생 김철주를 다른 영화입니다. 총 140분에 2부작으로 된 혁명영화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는 김철주가 항일연합전선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왕청유격근거지에 침투한 일제와 결탁한 참모장의 만행을 폭로하고 처벌하는 모습을 다루어 김씨 일가는 대대로 혁명적인 가정이라는 것이 영화를 통해 강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김정일은 혁명영화 창작에서 김일성의 첫 부인(전처)이며 자기의 친어머니(생모)인 김정숙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김정숙을 형상한 혁명영화로는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 ‘미래를 꽃피운 사랑’, ‘압록강을 넘나들며’, ‘친위전사’, ‘해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그동안 백두산창작단이 ‘1호 영화’들을 창작하던 경험을 살려 김일성의 초기혁명활동을 내용으로 하는 다부작 혁명영화 ‘조선의 별’을 창작하도록 하였습니다. 1980년부터 1987년 사이에 10부작 혁명영화인 ‘조선의 별’이 창작되었고 1987년부터 1991년까지 5부작 혁명영화인 ‘민족의 태양’이 창작되었습니다.

혁명영화 ‘조선의 별’ 제1부는 국내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김혁이 김성주를 길림에서 만나 혁명송가 ‘조선의 별’을 짓고 보급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결국 노래제목이 영화제목으로 된 셈입니다. 김정일은 1980년 8월 4일에 중앙당 선전선동부 책임일꾼들에게 혁명영화 ‘조선의 별’ 창작을 위한 조직정치사업을 잘 할데 대해 강조하였고 9월 13일에는 야외촬영장에 나와 현지시찰을 하였습니다.

김정일은 1981년 3월에는 혁명영화 ‘조선의 별’ 3부를 보고나서 창작가들에게 잘 만들었다고 치하하면서 그 속편들을 꾸준히 진행할 데 대해 지시하였습니다. 결국 혁명영화 ‘조선의 별’이 10부작으로 완성되고 뒤이어 5부작인 혁명영화 ‘민족의 태양’이 창작되었습니다. ‘민족의 태양’은 총 5부로 만들어졌지만 1부부터 4부까지는 전, 후편으로 이루어져 실제로는 9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을 형상한 혁명영화 창작에서 작품을 시기별로 나열할 것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내용을 전개할 데 대한 문제, 수령의 두리에 굳게 뭉친 동지애의 역사가 곧 조선혁명의 역사라는 것을 깊이 심어줄데 대한 문제, 영화 주제가를 창작하여 영화에 삽입하는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선전선동부 일꾼들과 창작가들에게 강조하였습니다.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영화창작에서 김일성 우상화 세뇌선전을 목적으로 창작된 혁명영화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주민들에게는 진솔한 일상생활보다 사상선전이라는 딱딱한 영화라는 의미에서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김정일이 한국 영화감독과 배우부부인 신상옥, 최은희 부부를 납치하여 신필름영화창작을 진행하였던 내용을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