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의 대남도발은 휴전선 일대 무장도발, 해상침투, 간첩파견, 핵과 미사일 발사시험, 사이버테러 등 다양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대남도발로 일어난 대한민국의 여객기와 어선 납치, 민간인 납치사건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광복 후 북한 외부에서 많은 인재들을 회유와 강압적인 방법으로 월북시켜 김일성종합대학 등 북한의 여러 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도록 했고 공작원 양성을 위한 외국어 교육을 위해 일본인들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도 납치했습니다.
또 김씨 왕조 북한의 영원한 세습독재를 위한 대남도발은 대한민국의 국군 군인들뿐 아니라 민간인들에 대한 납치와 테러로도 이어졌습니다. 지식인, 기술자, 종교인, 정치인, 예술인 등 북한의 납치대상에는 제한이 없었죠. 그 중에 오늘은 2000년에 들어와 북한 통전부가 강행한 김동식 목사(1947년생) 납치사건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동식 목사는 김씨 왕조 독재에서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을 자기의 친 자식처럼 사랑하던 종교인으로 북한에 납치되기 4년 전인 1996년에는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경기대회, 당시 여자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북한의 계순희 선수와 기념촬영까지 했던 목사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고난의 행군시기, 함경북도와 양강도, 평안북도 등 북-중 국경지역에서는 아사로 죽을 바에야 생사를 건 도강을 하여 중국에 가려는 탈북자들이 대거 발생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꽃제비들도, 중국의 산간오지들과 도시 곳곳에서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가며 거지로 방랑하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김동식 목사는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탈북한 북한 동포들과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미국 영주권자였던 김동식 목사는 중국 내 탈북자들을 도와주려고 미국에서 중국으로 와서 연길에서 보육원 겸 선교센터인 ‘사랑의 집’을 운영하면서 꽃제비 30여 명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2000년 1월 16일 중국의 연길조선족자치주의 한 식당에서 당시 53세였던 김동식 목사는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되어 북송되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살 수 없어 죽을 바에는 중국에 가서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먹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며, 생사를 각오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도강한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공안에 잡혀 북송되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을 도와주려고 했던 종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 보위부와 보위사령부는 도강한 것을 민족반역자로 취급하기에 그들을 돕는 김동식 목사의 사랑과 애정에 넘친 행동마저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도 주인이 먹이를 주지 않고 때리기만 하면 달아납니다. 하물며 의식을 가진 북한 주민들이 배급도 주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굶어죽어야 하는데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일까요?
고난의 행군시기에는 어머니당이라고 하는 노동당도 없었습니다. 당 간부들과 법관들, 행정 간부들이 굶어죽지 않으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악착하게 뇌물을 요구했고 먼저 도강하여 중국으로 탈북하기도 했죠. 그런데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 보위부와 보위사령부는 중국에까지 손을 뻗쳐 이미 중국에서 숨어서 살아가는 탈북자들을 마구 잡아서 북송하고 있었습니다.
2000년 1월 16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공작원들에 의해 연길에서 차량에 탔다가 납치된 김동식 목사는 북한에 끌려가 온갖 고문과 박해를 다 받다가 그 이듬해인 2001년 2월에 사망했고 시신은 평양시 상원군에 있는 91훈련소 위수구역 내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북한 보위부는 김동식 목사에게 주체사상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전향을 강요했고 식사도 주지 않아 80kg에 달했던 체중이 급격히 줄어 사망 당시에는 35kg의 몸무게로 감소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들과 그들을 도왔던 조선족까지 합쳐 9명 중에 조선족 2명이 2005년에 대한민국에 건설노동으로 돈을 벌려고 왔다가 체포되어 그들이 북한 보위원들을 통해 전해들은 내용들이 공개되면서 김동식 목사의 최후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동식 목사의 부인 정영화 씨는 “김동식 목사가 예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라는 북한 당국의 말을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며 “남편은 2000년경 강제 납치당해 북한의 수용소에 끌려갔고 이후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김동식 목사의 송환운동을 펼쳐온 북한 인권단체인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대표는 “김 목사가 납치당한 이듬해 고문과 건강상의 이유로 사망했다”며 “북한 국가안전보위부가 김 목사에 대한 간첩 조작, 자진 월북 회유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김 목사를 고의적으로 방치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고 그는 사망 당시 직장암, 각종 고문 후유증, 폐쇄 공포증에 의한 우울증, 영양실조로 처참하게 순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동식 목사의 납치과정은 2005년 미국으로 망명한 탈북자 전모 씨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김동식 목사 납치범인 북한 보위부 공작원 김모 씨가 태국 이민국 수용소에서 함께 미국 망명을 신청했던 전모 씨에게 자기가 김동식 목사를 납치했었다고 말했는데, 이 사실을 전모 씨가 제보해서 결국 덜미가 잡히게 된 것입니다.
김동식 목사를 납치해 북송했던 북한 보위부 공작원 김모 씨는 김동식 목사 납치와 탈북자 색출 등 중국 내 공작 활동이 문제가 되어 중국공안에 체포되자 동북지역 교도소를 떠돌며 4년간 복역한 뒤 출소했지만 북한 당국이 신병 인수를 거부하자 배신감을 느껴 태국으로 탈출한 뒤 미국 망명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김모 씨는 그 이후 북한 보위부 공작활동 개입과 복역 문제로 미국 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반 탈북자로 위장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가 김동식 목사를 납치하면서 직접 팔을 잡아 택시에 강제로 태웠고 북한에 넘기기 전에 휴대전화와 돈 1,000 달러를 빼앗아 나눠 가진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처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검찰과 국가정보원은 김동식 목사 납치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 북한 보위부 공작원 3명과 조선족 6명 등 9명이 조직적으로 이 사건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적극적인 수사를 벌여 공범들인 조선족 류모 씨와 김모 씨를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은 김 목사 납치에 가담한 조선족 류영화 씨(35·구속)와 탈북자 체포 임무를 수행했던 북한 보위부 공작원 출신 탈북자 이춘길 씨(가명) 그리고 같은 협의로 구속, 기소된 중국 조선족 김모 씨 등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해 대한민국의 교도소들에서 복역하도록 했습니다.
대한민국 검찰당국은 조선족 류영화 씨에 대해 “조선족인데 북한 보위부에 포섭돼 공작금과 지령을 받고 보위부 소속 공작원으로 활동했다”며 “중국에서 탈북자 10여 명을 납치해 북한으로 압송하는 과정에도 개입했다”고 밝혔습니다. 류영화 씨는 2001년 8월 또 다른 공범인 이모 씨(34)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막노동판 등에서 일하며 지내다 공안 당국의 수사망에 포착돼 체포되어 2005년 4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김동식 목사 납치사건과 관련해 탈북민들과 대북 소식통들은 “북한은 정찰총국 외에 국가안전보위부와 군 보위사령부에서도 조선족이나 제3국 범죄조직을 고용해 탈북자와 반북(反北) 인사들에 대한 납치·청부살인을 감행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정은은 더 이상 살인적인 납치사건과 탈북민 북송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그 죄과는 더 커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