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6개월 동안 현재의 북한사회가 겉으로만 사회주의를 표방할 뿐 현대판봉건왕조국가라는 사실을 지난 고려봉건왕조와 이조봉건왕조와 비교하면서 설명해드렸습니다.
고려왕조시대나 이조왕조시대에는 유교와 불교가 국교였지만 도교나 무속신앙 등 여러 종교들을 금하지 않았으며 실지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현대판 봉건국가인 김씨왕조는 주체사상 이외에는 그 어떤 사상이나 이념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만약 기독교나 불교 등 다른 종교이념을 숭배하면 가차없이 처벌하고 있죠.
그래서 오늘부터 김씨왕조 북한이 주장하는 주체사상의 반동적 본질과 국가종교로 변질된 주체사상 숭배과정의 반인민성에 대해 여러 시간에 걸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수십 년 동안 북한에서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주입한 주체사상에 대해서만 듣다보니, 주체사상을 국가종교로 규정하면서 북한당국이 강행한 종교탄압과 주체사상의 국가종교화 그리고 숭배의식 배양을 위한 사상전 전략 등의 '반동적 본질'을 알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북한의 종교정책의 변화과정과 해방 후 강행한 종교탄압정책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종교정책에 대해 연구자들은 시기별로 종교탄압기, 종교말살기, 주체사상 주입기, 이면적 종교정책 시행기, 정보통제정책기, 사상심화정책기 등으로 나눕니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탄으로 국가붕괴 위기에 놓였던 일본은 1945년에 백기를 들고 항복함으로서 우리나라는 해방되었으나, 소련군의 북한진주로 북한 땅은 소련식 공산국가로 전락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공산국가들은 마르크스주의 이외에 다른 사상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북한당국도 해방되어 6·25 남침전쟁을 일으켰던 1950년까지 북한 전역에서 종교탄압을 강행하였습니다. 이 시기를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를 연구한 연구자들마다 종교정책 배척기, 종교제한기, 종교탄압기 등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이 해방 이후 구소련의 공산화를 도입하면서 끌어들인 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1818-1883)와 엥겔스(1820-1895)에 의해 19세기에 등장한 이데올로기로 19세기 당시의 3가지 주요 학문 조류였던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정치경제학,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체계는 헤겔 및 포이어바흐 등 19세기 고전철학에서 변증법과 유물론을 또 영국의 고전경제학 중에서도 특히 리카도의 경제학으로부터 노동가치설을 그리고 프랑스의 생시몽(Saint-Simon), 푸리에(Fourier), 오웬(Owen) 등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통일시키는 과정에 형성되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전략과 전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을 위한 계급해방 실현의 유일한 사상과 이론이라고 주장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89년 12월 25일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의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기가 내려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철학사상을 비판한 자기의 논문[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발언을 처음 하였으며 이후 종교에 대한 비판의 대명사로 사용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북한당국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명제를 자주 강연회들에서 역설하는 것을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레닌도 "종교는 사람들을 짓누르는 도구이며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안식에 대한 환상에 빠져 사람들이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잃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아편과 같은 종교를 설교하는 성직자들을 반동계급으로 규정하고 교회와 성직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 김일성도 "종교를 아편"이라며 종교탄압을 강행했습니다. 해방 전 북한에는 일제강점기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불교, 천도교 등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습니다. 해방 후 북한의 모든 권력은 소련군 장교들로 이루어진 소련군정에 의해 감독, 관리되었으며 소련공산당의 지령을 받고 있던 김일성은 종교인들의 종교의식과 활동을 노골적으로 제약했습니다.
북한당국은 해방 후 처음 맞는 1946년의 3·1절 행사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주관하여 진행하려고 했으나 당시 북한의 기독교 단체들은 이에 반발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별도로 3·1절 기념예배를 강행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야코브 노비첸코에 대해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기독교 단체들이 교회에 모여서 3·1절 행사를 할 동안 김일성은 평양역 광장에서 진행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주관하는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했다가 반공청년단체인 백의사 소속 청년이 던진 수류탄 투척사건이 바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북한당국은 평양역 광장에서 진행된 3·1절 기념행사에 종교인들도 참석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교회지도자 박대선 목사 등 50여 명을 체포하여 40여일 동안 구금하였습니다.
1946년 3월 5일에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북한당국이 교회와 사찰, 수도원들이 소유하였던 토지들을 무상몰수하자 이를 계기로 1946년 11월 3일 북한 지역의 기독교를 대변하는 이북5도 연합노회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일요일에는 예배 외에 어떠한 행사도 참가할 수 없으며, 예배당도 예배 목적 이외에 사용할 수 없음을 전달하였고 소련공산당과 그 지령을 받는 북조선임시위원회를 '붉은 마귀'로 표현하면서 규탄예배를 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종교인 단체였던 이북5도 연합노회가 발표한 5개조 성명 내용은 첫째로 "성수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신자는 주일예배 외에 여하한 일도 할 수 없다" 둘째로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분리한다" 셋째로 "예배당은 신성을 확보하고 예배 외는 어떠한 행사도 허용치 않는다" 넷째로 "현직 교역자로서 정치나 다른 사업을 할 때는 성직을 사면해야 한다" 다섯째로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였습니다.
이때부터 공산당을 반대하는 종교인들과 소련공산당을 추종하는 북한정권 사이에는 적대적인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절을 비롯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였던 불교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5정보 이상을 소유한 사찰의 토지는 모두 몰수하였는데 전체 몰수 토지 100만 정보 가운데서 종교단체의 토지는 1만 5천 정보로, 전체 몰수 토지의 1.5%에 달했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당국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면서 규모가 큰 사찰은 30명, 작은 사찰은 5명분에 해당하는 식량만을 축소하여 배급함으로써 중들이 절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중소기업가, 수공업자, 중농 이상의 농민을 기반으로 했던 개신교 역시 토지개혁으로 많은 곤경을 당하였습니다. 1946년 8월 10일 산업국유화법령으로 종교인들과 종교단체가 운영하던 기업, 학교 등이 몰수되었고 1950년 3월에 채택된 형법에 "종교단체에서 행정적 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교화노동에 처한다(제21장 258조)"라고 규정하였고 "종교단체에 기부를 강요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제21장 259조)"고 규정함으로써 종교 활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했습니다.
북한정권은 1946년 11월 25일부터 진행된 <미신타파돌격기간>에 종교탄압의 수위를 더 높였습니다. 김일성은 1946년 11월 25일에 열린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제3차 확대위원회 석상에서 "만약 종교활동가 중 어떤 사람이 종교의 전통과 교리를 이유로 이 선거에 신도, 승려, 목사들의 참가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외국에 매수당한 스파이로서 종교를 체제파괴활동에 이용하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고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1948년 9월 9일에 북한 정권이 수립된 후 북한당국의 종교인들에 대한 감시와 검거 선풍은 극에 달했습니다. 당시 교인들의 아침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어제 어디의 누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였다고 합니다.
1949년 4월을 전후하여 종교인들에 대한 1차 검거가 있었고 그해 여름에 2차 검거 그리고 11월경부터 3차 검거에 들어갔으며, 6·25남침전쟁이 일어난 195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많은 종교인들이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현대판 봉건독재국가인 북한에서 종교탄압은 영원한 김씨왕조를 위한 인권탄압행위였으며 지금도 김정은에 의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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