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일성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친 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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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해방 후 소련공산당의 꼭두각시로서 북한의 지도자로 둔갑한 김일성이 1946년 11월에 열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3차 확대회의에서 <미신타파돌격기간>을 선포하고 종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강행한데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시기에 북한에는 첫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이 창립되었고 철학부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과목이 개설되었습니다. 오늘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친,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이었던 박일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보다 한 살 위인 박일은 1911년 5월 1일에 러시아 극동지역인 연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표도르 알렉산드로비치(Пaк-Ир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불린 박일은 14살에 간도의 동운중학교에 입학했고 19살엔 1929년에는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고려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고려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 박일은 연해주 한인마을의 7년제 학교에서 교육부 주임 겸 문화교원으로 근무했고 1934년부터 1940년까지는 레닌그라드 국립교육대학 철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박일은 대학을 졸업하고 1940년부터 1942년까지는 키르기즈스탄의 오슈사범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학생들에게 가르쳤고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우즈겐시(Өзгөн)의 중학교 교무주임으로 근무했습니다.

박일은 1944년에 키르기즈스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건너와 카자흐스탄의 알마타 국립대학 철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어 1년이 지난 1946년 박일은 소련공산당으로부터 북조선에 나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칠 과업을 받게 됩니다.

91세가 되던 2001년에 노환으로 사망한 박일은 구소련이 붕괴된 후에야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자신이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치던 일들을 회고하면서 해방 후 소련공산당과 소련 군정의 앞잡이였던 김일성과 북한당국의 당시의 현황들을 상세히 폭로하였습니다.

박일은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 김두봉이 정치인으로 대학 행정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나 다름없는 직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김일성종합대학이 창립되었던 1946년 10월부터 1948년 1월 초순까지 김일성과 김두봉의 개인 철학교수로 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대학 교수이면서도 조선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데다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1999년 초여름 서울을 방문한 박일은 “대학 부총장 취임 3개월 뒤인 1946년 12월 어느 날 북한주둔 소련군 참모부 민정장관이던 로마넨코 대장으로부터 김일성과 김일성대학 명예총장으로 있던 북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김두봉에게 마르크스·레닌사상을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35세의 박일 부총장은 1946년 10월 하순부터 김일성에게 스탈린의 저서 ‘소련공산당약사’를 묘향산 기슭에 있던 김일성 숙소에서 매일 아침 1시간씩 가르쳤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박일 부총장은 길림육문중학교 중퇴생인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부분을 비롯하여 책 전반내용을 가장 알기 쉽게 설명했으나 김일성은 처음에는 이해를 잘 하지 못하였다며 결국 ‘사회’, ‘인민’, ‘공산주의’, ‘사회주의’, ‘철학’ 등 기본개념을 무려 2개월간이나 가르쳐야 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박일 부총장은 1947년 5월까지 7개월 동안 김일성에게 매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으나 그 이후로는 김일성의 일정이 바빠지면서 1주일에 3번 정도씩 가르쳤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중국공산당 중국팔로군 출신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 이름이 있는 유명한 반일독립운동가들과 그 조직들이 있었기에 김일성에게는 이를 견제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박일 부총장은 당시 북한 군정을 맡은 소련군 총책임자 레베제프 대장으로부터 ‘김일성은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이라는 내용을 담은 김일성혁명투쟁사를 쓸 과업을 받았습니다. 박일 부총장은 1년 4개월간 1주일에 2∼3회씩 김일성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고 4권 분량의 김일성혁명투쟁사를 러시아어로 만들었으나 김일성의 증언들이 허구가 많아 결국 도서출판은 보류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지점들을 지도에서 찾을 수 없었고 “김정일이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질문에는 “그걸 알아서 뭐하겠느냐”며 대답을 회피했다고 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일성이 1940년 10월 23일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들어갔다가 소련국경수비대에 체포되었고 중국출신 소련군이었던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소련군에 입대한 사실을 지난 시간들에서 설명을 통해 알고 계실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북한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혁명역사를 배우면서도 왜 김일성의 혁명활동이 1941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5년 동안 공백상태인지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와서야 김일성의 1940년대 소련군 복무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 소속의 88독립보병여단, 일명 88저격여단은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망명한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들을 수용하기 위해 창설한 부대로, 북한의 백두산줄기는 이 88저격여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김정숙이 김정일을 임신한 상태에서 20명도 안 되는 부대인원으로 소련국경을 넘었던 김일성은 소련국경수비대에서 풀려나 바로 소련군에 복무하게 됩니다. 1941년 2월 16일 김정일은 블라디보스크와 우수리스크의 중간에 있는 라즈돌노예 마을,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Вятское)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정일의 생일을 1941년에서 1942년으로 늦춘 이유가 김일성의 출생 연도인 1912년과 끝자리를 맞춰 정주년마다 크게 경축하는 부자의 생일을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일성은 88여단 창설로 1942년 7월에 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함께 88저격여단에서 복무한 조선인이 약 60여 명입니다.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공개된 비밀자료들에는 1942년 6월부터 1945년 9월까지 3년 3개월 동안 구소련 대위로 복무했던 88저격여단의 실체가 공개되었죠. 88저격여단 주보중 여단장과 슈린스키 참모장이 공동으로 작성한 ‘북조선에서 일하게 될 소련 극동군 제2전선군 88특별저격정찰여단의 제1대대 명단’에는 60명의 조선인 병사들의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과 임춘추, 안길, 김책, 서철 등 5명만 중등교육을 받았던 인물들입니다. 소련공산당이 박일 부총장을 북조선에 파견한 이유는 이렇듯 김일성을 비롯해 중등학교 졸업 혹은 중퇴생인 이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쳐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박일 부총장은 평양 및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마

르크스-레닌주의 강연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강연을 시작할 데 대한 지시를 받았지만 청중들과 함께 ‘만세환호’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정의 허가도 없이 김일성종합대학에 조선학과를 개설하였고 당시 우리나라 국기이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추방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울을 방문하여 하늘과 땅차이로 변한 지상천국 대한민국과 지옥의 땅 북한을 비교하면서 박일 부총장은 “국가와 사회, 문화, 철학 모든 분야에서 거짓말로 세워진 나라가 북한입니다. 인민을 속이고 탄압하는 정부는 민족 전체를 위해 사라져야 합니다”는 말로 북한정권을 향해 강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통일되는 날까지 살아 동포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싶다”던 박일 부총장은 비록 91세 노환으로 사망하였으나 그가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북한의 민주화와 개혁개방의 꿈은 청취자 여러분들의 의지로 반드시 실현되리라 믿으면서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