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딱 두만강을 건넜을 때 여기에 다신 발을 안 딛는다고 하고 이렇게 떠났거든요.
김은주: 두만강 건너다 총에 맞아 죽더라도 한번 시도해보자.
김강우: 잡히면 최선의 방법은 자결하는 거고…
박성미: 이 강만 건너면 내 인생에 반전이 있다 이런 설렘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노경미: 배고픔이죠. 북한에서야… 그때 그 ‘의지’와 그때 그 ‘악’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은 하래도 못하죠.
김명희: 저희 한 아파트에 정확하게 48세대가 살았는데 한 집 건너 한 명씩 안 죽은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같이 공부를 하고 있던 옆 친구들도 영양실조로 옆에서 바로바로 쓰러지고 부모님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다 돌아가시고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서 살아야 되나?
김은주: 누웠는데 며칠을 이제 먹지 못하다 보니까 몸을 지탱할 힘이 몸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누워 있으니까 이 몸을 바닥에 빨아들이는 같은 느낌이 이제 들었던 거죠. 엄마한테 버려졌다는 게 너무 서러웠고 잠이 들었는데 엄마가 진짜 오셨어요. 그날 하셨던 첫마디가 ‘다 같이 죽자’ 였어요. 근데 또 사람 목숨이 그렇게 쉽게 또 하늘나라로 가지는 않더라고요. 점심까지 누워 있다가 엄마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시는 거예요.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떼어내는 거였어요. 사진만 빼고 그 틀 사진 틀을 가져다가 음식과 바꿔 먹고 그 순간부터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 주민들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 북한을 떠났습니다. 먹고 살 길이 있다면 두만강, 아니 도망강을 건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기력하게 머물다 굶어 죽는 것보단 나았으니까요.
김은주: 말 그대로 이제 꽃제비… 집 없이 아무 데나 몸을 뉘여서 자고, 산에서도 자고, 뭐 강에서도 자고, 장마당에서도 자고 엄마가 그때 ‘중국에 가면 사탕 과자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단다’ 이 얘기를 이제 친구로부터 들은 거죠. 그래서 엄마가 여기서 굶어 죽을 바에는 두만강 건너다 총에 맞아 죽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자.
노경미: 그래서 두만강이라 안 하잖아요. ‘도망강’이라고 불러요. 중국에 대한 환상적인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배 따는 철이 돼가지고 이제 가게 되면 하루에 돈 30원씩 번다는 거예요. 북한 돈으로 계산하면 30원이 그때 돈으로 대단하거든요. 그럼 가서 한 달 가서 벌어가지고 오면 되지 않겠냐… 그래서 딸과 같이 둘이 돈을 벌어보자고 사실은 두만강을 건넜어요.
1990년대 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해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들의 숫자는 3만~5만명으로 추정, 하지만 이들 가운데 한국으로 입국한 사람들은 10%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1990년대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수는 500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 그 수가 급격히 늘면서 2004년 한 해에만 1894명의 탈북자가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2000년대에는 북한을 탈출한 이유도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는데요.
장세율: 북한 사람들이 이제 한국에 대해서 인식을 하기 시작을 한 거는 그 고난의 행군 시기, 90년도에 공급이 차단이 되고 시장 경제가 활성화가 됐죠. 장마당이라는 데 다 뛰쳐나가서 이 물물교환 그리고 이제 중국 장사꾼들이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CD, DVD 이런 것들이 이제 유행이 되기 시작했죠. 제가 한국 드라마를 봤던 게 2004년도인데 2004년도의 분위기는 어땠는가 하면 일단 누구나 다 보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내가 진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한국 영화라는 걸 봤거든요. 남자의 향기! 이게 자기 사랑하던 애인의 살인을 자기가 뒤집어쓰고 자기가 잡혀 가서 교수형 당하는 그런 거예요. ‘야 남조선 사회에 아무리 썩고 병든 사회라도 저기도 동정이 있고 정의가 있고 사랑이 있네’ 이랬거든요. 그걸 6명이 같이 봤는데 그 중에 이제 보위부 스파이가 하나 있던 거예요. 그 순간에 결국 제가 반동으로 전환이 된 거죠. 어랑천발전소라는 데로. 교수직에서 좌천이 돼서 한 1년 좀 지났는데 ‘야 복귀되는 것 같다’ 막 이래가지고 들떠 있었는데, 저는 복귀가 안 됐죠. 그런 정치적 각오 때문에 인생이 막혔다는 그런 좌절감으로 정말 비통했죠. 많이 울고. 야 이거 이제는 내 인생이 이젠 여기서 끝났구나, 뭐 더 이상 뭐 발전을 못한다 그러면은 이게 뭐 여기 있을 이유도 없고…
1995년 출간된 하병무 작가의 소설 ‘남자의 향기’는 150만부 이상 팔릴 정도로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3년 뒤 영화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사랑 얘기도, 남자주인공의 조직폭력배 생활 얘기도 어느 한쪽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내용이 난해하게 펼쳐졌다는 평가와 함께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죠. 하지만 북한에선 또 다른 시각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 같네요. 영화평 한 마디로 탄탄했던 인생이 벼랑 끝에 몰린 장세율 씨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탈북을 택했습니다. 시대가 바뀔수록 탈북의 이유도 달라지는데요. 장마당 세대들은 과연 어떤 이유로 위험한 탈북을 감행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