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목숨 걸고 한국에 온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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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화: 일단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정말 너무 좋았어요. 행복했어요.

김강우: 한국사회에 대해 신기했던 게 커피를 엄청 잘 마시더라고요. 사람들이…

조현정: 밤에 창문을 열었는데 십자가가, 빨간 십자가가 너무 많이 보였어요. 그게 한국에서 왔을 때 첫 이미지였어요. 교회가 참 많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PD: 한국행을 결심한 계기가 있으세요?
노경미: 북한으로 내가 북송됐잖아요. 그런데 내가 중국 연변 투문, 조선 말로 말하면 도문이죠. 변방 감옥이 있어요. 북한 사람들이 있는… 그때는 다 이제 북한으로 북송될 사람들이니까 북한에 대한 김정일에 대한 욕을 못 하잖아요. 근데 한 여자는 막 하는 거예요. 막 '저 김정일이 저 놈이 정치를 잘못해서 우리 북한 사람들이 이 개고생한다'고… 그런데 그 다음 날인가 그녀가 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막 손을 흔들면서 '쟤는 어떻게 나가니' 하니까 쟤는 한국에 갔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가지고 여기 시집이 연길에 있어서 시집에 왔다 붙들렸대요. 그러니까 북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여권에 신분증 다 내놓고 하니까 공안에서 할 말이 없거든요.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데… 그래서 나가는 거예요. 그때 그 감옥 안에 그때 내 알기로는 한 100명 있었을 거예요. 여자들이 다 울었어요. 너무도 부러워서… 정말 그 순간에 내가 대한민국 가고 싶은 생각이 막 충동 같이 일어… '나가게 되면 무조건 대한민국 갈 것이다' 그때 결심했어요. 북한으로 북송됐다가 다시 중국 들어왔잖아요. 들어와가지고 내가 한국 사이트에 들어가서 본 게 뭘 봤는가 북한 탈북자들이 대사관을 막 다른 나라 대사관을 담을 뛰어넘고 이런 걸 내가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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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적이 있어야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노경미 씨는 북송된 뒤에도 재탈북해 한국에 갈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노경미: 그때 나도 사다리를 사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택시를 불렀어요. 오늘 내 저기를 무조건 들어가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북경에 있는 베이징에 있는 대사관은 담장 길이가 다 3m에, 감시 카메라에, 가시 철조망에, 무장 보안이 한 50m 간격으로 1명씩 동서남북으로 서 있더라고요. 얼씬도 못하겠더라고요. 우둔한 사람이 범 잡는다고 오늘 낮에 하자 밤에 하면 더 위험하겠는데 그 다음에 사람이 점심시간이니까 조금 뜸해진 틈을 타서 그 포장을 뜯고 그 다음에 그 사다리를 폈어요. 기를 쓰고 올리고 그 꼭대기까지 올렸어요. 그 사다리 놓는데 1~2분도 안 걸렸어요. 그 사다리 타고 울타리까지 올라서서 그 3m 안쪽으로 내가 뛰어내렸어요. 그러더니 안에서 오라고 그러더라고요. '이제부터는 이게 우리 땅 미국 부지이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고 있어라. 여기에서 마음 편히 계시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대사관 생활을 8개월을 했어요.

2002년 3월 14일 탈북자 25명이 중국 베이징 내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하는 등 2000년대 중국 내 한국을 비롯한 유럽, 미국 등 해외 영사관이나 학교로 진입해 한국행에 성공한 경우가 많았는데요. 물론 실패해 중국 공안에 붙잡히면 다시 북송되는 끔찍한 일을 겪어야만 했죠. 2005년 탈북한 이경화 씨는 한국 땅을 밟기 전까지 언제 어디에서 북송될 지 몰라 불안에 떨었습니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도 그 불안은 계속됐죠.

이경화: 일단은 그 태국에서 비행기 탈 때까지만 해도 엄청 불안했거든요. 왜냐하면 그러니까 비행기에 타도 어쨌든 불안했던 이유가 한국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한국에 도착을 해야만 잡혀가거나 되돌아가거나 이러지 않는다는 인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무사히 한국땅을 밟은 탈북자들, 이들 눈에 비친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을까요?

이경화: 일단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정말 너무 좋았어요. 행복했어요.
김강우: 그거 생각났어요. 신기했던 거. 한국사회에 대해 신기했던 게 커피를 엄청 잘 마시더라고요. 사람들이…
조현정: 밤에 창문을 열었는데 십자가가, 빨간 십자가가 너무 많이 보였어요. 그게 한국에서 왔을 때 첫 이미지였었어요. 교회가 참 많다.
서기원: 화장실이 너무 깨끗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오긴 왔구나.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확 이제부터 뭐 그냥 막 놀러 왔다는 기분 같은 게 막 드는 거죠.

한유미: 하나원 나와서 제가 3월 6일에 나오고 6월달에 해운대라는 데를 갔어요. 제가 실제로 이제 비키니 입은 모습을 처음 봤거든요. 그게 가장 쇼킹했어요. 손바닥보다 더 작은 저 천쪼가리로 가리고 다니는데 저거 불안해서 저는 같은 여잔데 진짜 계속 봤었어요.

PD: 이게 저희는 처음 보는 겁니다.
김정아: 네. 이 앞에는 이렇게 임시 신분증으로 돼 있고요. 여기가 통일부 마크가 돼 있어요. 그러면 이 뒤에 바로 '이 사람은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한 보호 대상자이며 의료급여 수급자임을 증명함'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정식으로 나를 보호하는구나 그걸 이거 매일 밤 저 이렇게 가슴에 끌어안고 잤댔어요. 그때.

처음 한국에 와서 받은 새로운 신분증, 탈북민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가기 전 받은 임시 신분증이었지만 김정아 씨는 처음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잠 못 이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하나원을 퇴소해서 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이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한국에만 오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던 탈북자들이 처음 느끼는 자본주의의 쓴맛, 다음 시간에 들어봅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