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착 탈북민들] 웃음을 되찾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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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유타주는 사막부터 고산지대의 무성한 숲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염도가 25퍼센트나 되는 소금 호수의 이름을 따서 만든 주도인 솔트레이크 시티는 1860년 미국 대륙철도 완성을 시작으로 서부개척 시대로부터 동서를 잇는 교통망이 발달한 곳이죠. 오늘은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아들과 함께 미국 정착생활을 하는 김옥향 씨의 이야기 입니다. 김옥향 씨는 2008년 탈북을 하여 중국을 거쳐서 미국에 옵니다.

김옥향 :하루 하루 지나면서 살아보니까 미국은 공평하고 자유롭고 내가 노력하면 노력한 것만큼 이루고 어떤 곳에서 태어났든 그 출신 성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요. 아들도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죠.

옥향 씨는 종종 북한과 중국에서의 삶과 미국에서의 삶을 비교해 보기도 합니다. 사실 미국에 처음에 왔을 때 미국 생활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치열한 경쟁 그리고 경쟁에서 뒤처졌을 때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허탈감은 괜히 미국에 왔나 하는 생각도 들게 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가 나름 보호해 준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미국에서는 혼자서 독립적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 김 씨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북한도 빈부차이가 커져가고 있고 빈곤 속에서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미국 생활이 훨씬 나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신분 문제와 언어 문제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옥향 씨는 지금도 종종 중국에서 힘들었던 생각이 마음을 졸이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 중국 생활에 비교하면 너무 미국 생활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옥향 씨는 탈북한 후 중국에서 7년간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한달 밖에 안된 아들과 먼저 탈북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나이가 좀더 많은 딸이 탈북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신분이 없어 불법체류자가 되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사춘기 딸이 가출을 하는 바람에 같이 미국에 올 수가 없었죠. 옥향 씨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지만 중국에 있는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고 합니다.

김옥향 : 왜 가출을 했을까? 저는 숨어살면서 하루 하루 연명을 해야 하니까 자식이 왜 나가는지, 왜 힘들어하는 신경을 전혀 못썼죠. 또 북한사람이 아닌 척 해야 하고 긴장하니 자식들에게 신경을 못썼어요.

김옥향 씨는 혼자서 아들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의 형제의 나라라고 말하는 중국이 탈북민을 강제로 북송 시키고 불안한 신분 때문에 가혹한 상황에 처했던 중국 생활을 생각하면 미국 생활은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김 씨는 기대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이 14살의 중학생인데 학교에서도 우등생으로 나중에 건축가 또는 미국과 북한을 위한 정치가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생각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옥향 씨의 아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소망을 가지고 미국 정착과 학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옥향 씨는 지금도 아들이 미국에 처음 와서 힘들었던 때를 잊지 못합니다.

김옥향 : 아들이 국민학교 때는 영어 한마디도 모르고 1학년때부터도 아니고 2학년부터 학교를 다녔고 처음에는 영어를 잘 못해서 성적이 낮았는데…

옥향 씨는 아들과 단둘이서 개척하는 미국생활이라 경제적으로 녹녹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 가끔씩은 기우뚱할 때도 있지만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납니다. 김옥향 씨는 올해에는 또 다른 소원이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중국에 있는 딸을 미국에 데려와서 온 가족이 단란하게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옥향 씨의 미국 생활을 응원합니다.

진행 김성한,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