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거닐다 보면 수북히 떨어진 낙엽을 보면서 얼마남지 않은 한해를 아쉬워하게 됩니다. 기회의 땅으로 불리는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정착을 잘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앞만보고 달려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본 고장답게 자신의 삶은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야 기회가 오고 꿈도 이룰 수 있습니다. 미국에 온 탈북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 2009년 평안도를 떠나 미국에 사는 사라 김 씨의 이야기입니다.
사라김 : 2019년에 미국에 왔어요. 그런데 미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마음의 준비가 없이 왔던 상태라. 도저히 안정이 안되더라고요.
사라씨는 미국에 온지 3개월만에 두번이나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남성용 정장과 여성용 드레스 맞춤형 양복점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는데요. 직장에서 하는 일이 손에 익자 마음의 안정도 찾게 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으로 찾게 되자 이젠 미국생활이 즐겁습니다.
힘둘때는 탈북해 처음 정착했던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같이 온 어린 딸이 미국이 너무 좋고 살고 싶다고 해서 차마 미국을 떠나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고 엎친데덮친격으로 김씨가 미국에 왔던 2019년부터 코로나 비루스 사태로 발이 묶였는데요.
김 씨는 우선 살길을 찾아 미용, 머리, 화장기술 등을 배워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미용일을 할 수 없었고 그러던 중 앉아서 하면서 상당한 고급기술인 맞춤형 양복점에 취업을 하게 됩니다.
미국에 와서 직업을 찾고 일하던 중에 사라씨는 한국에서도 느꼈던 타지방 사람 차별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어디나 텃새라는 것이 있겠지만 미국에서 조차 같은 한국 사람들로부터 북한말씨를 쓰는 사라씨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사라씨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어린 딸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사라씨는 취직한 양복점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술을 익혔습니다. 최고의 맞춤형 양복, 양장 기술자로 서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노력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그녀는 마침내 고급 기술을 익히게 됐고 양복점 사장을 비롯하여 동료들과 미국인 손님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사라김 : 사람들 신체를 측청해서 그사람들에 맞는 원하는 최고의 양복을 맞추는 가게라고 보시면 되고요. 백인 여자들이 특히 드레스를 엄청 좋아해요. 손님들이 원하는 옷은 다만들어주고 고쳐주고요.
이제 미국의 꿈을 점차 이뤄가고 있는 사라씨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고향 북한에 대해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라 김 : 훗날에 우리애가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한반도에 특히 우리 북한사람들한테 어느 날 통일이 되거나 어떤 북한사람들을 위한 일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고요.
사라씨는 북한에도 한명의 딸이 있습니다. 북한에 살고 있는 딸에게도 나중에 다시 만날 때 미국에서 성공하여 자랑스러운 엄마로 보이길 소원하고 있습니다. 사라김씨의 소원과 만남이 꼭 이뤄지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진행 김성한,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