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농장의 밀보리 성공 사례 소개하는 10월 북한 강연제강
-“강냉이 위주의 농사 방식에 종지부를 찍어라”
-북한 당국이 옥수수보다 밀보리 농사에 매달리는 이유는?
[진행자]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 바로 청취자 여러분이 살고 계신 북한입니다. 내부 문서를 통해 오늘의 북한을 만나보는 [문서로 보는 북한] 이 시간, 진행에 안창규입니다.
[김지은] 오늘 저희가 다뤄볼 문서는 북한 당국이 알곡 농사 구조를 배와 강냉이(옥수수)에서 밀보리로 바꾸라는 지시와 관련된 강연 제강입니다. 이번 문서의 작성자는 조혜숙 강령군 읍농장 경리입니다. 보통 강연 제강이나 학습 제강은 대부분 국가 정책의 방향, 김 위원장의 지시 등을 전달하기 때문에 국가 기관이 작성자입니다만 최근 들어 개인 실명을 작성자로 밝히는 문건을 가끔 보게 됩니다.

[진행자] 문서는 한 농장 경리의 ‘경험 토론’ (일종의 체험기)을 강연 자료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에 있을 때 저도 ‘경험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토론문은 많은 손을 거쳐 계속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완성됩니다. 한마디로 “내가 혹은 우리가 이렇게 잘했다” 소개하는 내용인데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작성한 강연 제강에 비해 딱딱하지 않고 내용도 자세합니다. 특히 이런 개인이 쓴 글이니 숫자나 내용을 어느 정도 부풀려도 괜찮죠.
[김지은] 또 글에서 주장하는 부분에 대한 책임도 좀 덜하지 않겠습니까?
[진행자] 문서는 북한이 2021년 12월 노동당 제8기 4차 전원회의 이후 강조하는 밀보리 농사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도 참석한 전원회의에서는 농촌 살림집 건설 문제, 농업 기계화 문제, 밀보리 생산 확대를 골자로 한 ‘새 시대 농촌 건설 강령’이라는 것이 제시됐습니다. 이 강령에 따라 2022년부터 앞그루(이모작 중 1차 재배작물)로 밀보리를 뒷그루(2차 재배작물)로는 벼와 강냉이를 심는 이모작 농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됐습니다. 문서에서 주장하는 강령군 농장의 밀보리 작황은 어떻습니까?
[김지은] 밀보리 생산 실적이 정보당 5톤에서 최고 8톤~10톤의 높은 소출을 냈으며, 이에 따라 농장원들에게 올해 평균 300kg에서 많게는 700kg의 밀보리를 분배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강연 내용을 그대로 믿는 북한 주민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농사가 잘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식량 가격 하락인데, 지금 식량 가격이 입쌀 1kg당 8,200원(0.34달러)에서 8,500원(0.35달러)까지 육박합니다. 이는 공화국 정부가 생겨난 이래 최고가입니다.
[진행자] 원래 경험 토론이라는 것이 대중이 감동하도록 내용을 부풀리기 마련이지만, 문서에 언급된 밀보리 수확량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김지은] 최근 연락이 닿은 황해남도의 현지 소식통은 올해 밀보리 농사가 엉망이라고 밝혔습니다. 농장원들에게 분배는커녕 국가에 바칠 알곡 생산 계획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물지 않은 밀보리 밭째 군부대와 특수기관들에 떼어줬고 농사를 지은 농민은 밭에 손도 못 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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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고난의 행군 이후에 밭에서 알곡을 바로 실어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좀 어떻습니까?
[김지은]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원래는 쌀이나 강냉이를 추수한 뒤 가공해 군인들, 특수 단위 노동자들에게 배급해 왔죠. 그러나 운수 수단, 가공 기계, 기름 부족 등으로 농장에서 (알곡을) 가공할 조건이 안 되고 수확량도 적으니 가을이면 배급을 받는 단위들에 농장 밭째 내주고 알아서 가져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확량이 제대로 계산될 수 없습니다. 가장 (농사가) 안 된 밭과 가장 잘 된 밭에서 평당 수확고를 확인해, 평균을 내서 계산하는 게 원칙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농장에서는 판정 성원들에게 개를 잡고 돼지를 잡아 잘 대접해 주고는 수확고 판정을 높게 받으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들의 펜대에 따라서 한 해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게 대접하고 채 여물지 않은 곡식을 수분 함량을 잔뜩 부풀려 높은 수확고로 기록합니다. 추수한 뒤 가공하면 무게가 빠지니 수확량을 기록한다는 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이제는 누구도 국가의 알곡 생산 실적에 대한 선전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진행자] 매번 달라져서 놀라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달라지지 않아서 놀랍습니다. 저도 이 문서를 보며 놀란 부분이 있습니다. ‘과거 벼농사를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농장의 알곡 수확고가 ‘강냉이는 정보당 2 내지 3톤, 벼는 정보당 4톤에 불과했다’. 바로 이 내용입니다. 땅이 척박하고 냉해가 심한 북부 지역 농장보다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 실적이 소위 북한에서 최고의 곡창지대라고 하는 황해남도 주요 농장의 수확고라면 정말 너무 충격입니다.
[김지은] 지금까지 가을이 되면 노동신문에서 올해 알곡 생산을 넘쳐 수행했다고 밝힌 것들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셈입니다.

[진행자] 북한에서는 어떤 글이든 교시 혹은 말씀이라고 칭하는 지도자의 발언을 인용하고 그에 근거해서 내용을 전개하는 게 원칙입니다. 이 문서에도 “우리는 어떻게 하나 밀보리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려 인민들의 식생활 구조를 반드시 바꿔야 합니다”라는 김정은의 발언이 인용돼 있습니다. 또 문서를 관통하는 핵심 내용도 밀보리 농사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요, 이를 다시 풀이하면 북한 농민들에게 밀보리 농사의 필요성이 여전히 설득 안 된다는 의미 아닙니까?
[김지은] 그렇습니다. 강연 제강에도 모순되는 주장이 확인됩니다. 앞부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5차 회의에서 김정은이 농작물 배치를 대담하게 바꿀 때 대한 지침을 하달하자 농장원들이 환성을 지르며 반겼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채 여물지 않은 강냉이를 죽어도 베어내지 못한다고 농장 포전에 버티고 앉아서 죽기 내기로 막아서는 농장원이 있어 설득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고 돼 있습니다. 농장원들은 평생 농사를 지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밀보리 농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장 잘 알지 않겠습니까?

[진행자] 문서에서는 강냉이를 포기하고 밀보리 생산을 늘려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밝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태풍의 영향을 꼽습니다. 과연 태풍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북한이 직면한 식량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일까? 이 부분에서는 저도 동의하기 힘듭니다.
[김지은] 강연 제강에 보면 작성자는 당국의 주장처럼 밀보리로 전환해야 하는 첫번째 이유로 “밀보리는 키가 낮아서 태풍이 강하다”는 점을 꼽습니다. 또 해마다 8월과 9월에 닥치는 계절성 태풍의 영향을 받기 전에 수확하기 때문에 자연재해의 영향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태풍은 같은 지역에 같은 시간에 영향은 주는 것이 아니죠.
또 겨울 동안 김을 매지 않기 때문에 손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밀보리는 파종 후 겨울을 나는 동안 김을 매지 않는 장점이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는데요, 농사일을 해본 사람은 알 겁니다.
강냉이는 밭갈이하고 직파 즉 마른 강냉이 종자를 한두 알씩 뿌리고 발로 덮으면서 나가면 끝입니다. 그리고 두 번의 김매기를 끝으로 알곡을 거두게 됩니다. 그런데 보리는 씨를 뿌리고 일일이 다 발로 다져서 겨울나기를 할 준비를 하기 때문에 그 넓은 밭은 모두 발로 밟아야 합니다. 싹이 터서 잎이 5~ 6개 또는 아지가 2~3개가 되어야 겨울을 날 수 있고 싹을 틔우게 하려면 발로 빈틈없이 땅을 다져야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봄에 나가서도 그 넓은 밭을 다시 다져야 밀보리 소출을 기대할 수 있는 작물입니다. 결국 수백 정보를 가진 농장에 전부 밀보리를 심자면 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강냉이는 가을걷이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알곡이지만 밀보리는 빨리 수확을 못 하고 알곡이 모두 땅에 떨어지고 또 가공을 거쳐야 먹을 수 있는 겉곡이라는 점입니다.
김정은이 “알곡 생산 구조를 바꾸는 문제는 그 누구든 흥정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기 때문에 이에 반하는 행위는 곧 김정은의 사상과 지시를 반대하는 것이고, 당 정책을 반대하는 반동분자로 낙인되어 처벌받게 됩니다. 강연자도 밀보리를 주작으로 하라는 지시는 단순히 실무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 정책의 정당성을 실천으로 확충하기 위한 정치적 문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김 기자가 강냉이보다 밀보리가 수확량이 낮다, 또 농사일이 품도 많이 든다 이렇게 지적하셨는데 일부 농민들의 주장은 다릅니다. 밀보리가 노동 강도나 이런 측면에서는 더 수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문서에도 “밀보리 농사는 노력과 자재를 적게 들이면서도 옹근 소출을 거둘 수 있는 실리 있는 농사”, “밀보리 농사는 파종한 이후 김매기가 필요없다”. 식으면 딱딱하고 소화도 잘되지 않는 강냉이 음식에 비해 밀가루 음식이 먹기 편하고 빵, 지짐(부침), 뜨덕국(수제비), 칼국수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선 분명 북한 주민들이 환영할 수 있지만 수확량 부분에서는 우려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김지은] 그 일이 헐고 쉽고 뭐 이런 걸 따지는 것보다 결과적으로 한 해 농사 결실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진행자] 밀보리 농사에 대해 청취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가 틀리고 누가 맞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김정은의 지시로 전국에 동일하게 실행되는 방식은 문제입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남은 내용, 전하겠습니다. 김지은 기자 수고했습니다.
[김지은] 감사합니다.
[진행자]진행에 안창규였습니다.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