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고양이 뿔 빼고 모든 게 다 있다는 북한의 장마당, 그런 장마당에서 파는 물건 하나만 봐도 북한 경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하는데요. 북한에만 있는 물건부터 북한에도 있지만 그 의미가 다른 물건까지, 고양이 뿔 빼고 장마당에 있는 모든 물건을 들여다 봅니다. <장마당 돋보기>, 북한 경제 전문가 손혜민 기자와 함께 합니다. 안녕하세요?
손혜민 기자 :안녕하세요?
진행자 :한국에서도 12월이 되면 관공서나 은행, 기업, 학교, 병원 등에서 무료 달력을 받을 수 있고요. 다양한 형태의 예쁜 달력을 팔기도 합니다. 하지만 타치폰이나 각종 콤퓨터 등의 달력으로 일정 관리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한국에선 종이 달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예전만큼은 없는데요. 북한에선 어떨까요? 손 기자, 이맘때 장마당에서 잘 팔리는 게 달력이라고요?
손혜민 기자 :그렇습니다. 새해 맞이 상품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달력입니다. 집집마다 반드시 달력을 구매하니 판매 수량도 적지 않거든요. 12월 초부터 지방도시에 달력을 등에 지고 장마당에 넘겨주는 상인들이 등장하는 배경입니다. 말하자면, 달리기 장사꾼들이 나르는 상품이 달력이라는 말입니다. 달리기 장사꾼이란 지역과 지역 간 가격차를 이용하여 장사 물품을 나르는 사람을 말하는데, 장마당에서 파생된 '직업 명칭'입니다.
달리기 장사꾼의 역할은 시장과 시장을 연결하기도 하지만, 공기관과 시장을 연결해주기도 하는데요. 연말이면 이들이 국영 출판사에서 달력을 넘겨받아 장마당에 넘겨주는 경우입니다. 북한에서는 개인이 인쇄 설비를 소유하는 자체가 불법이어서 달력은 모두 평양종합인쇄공장 등 국영출판사에서 제작합니다. 국영기관에서 제작했다고 하여 국영기관이 장마당에 공공연히 달력을 판매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그러니 달리기 장사꾼이 필요한 거죠.
달력 장사는 11월부터 1월까지 계절장사이므로 장마당에는 매대가 따로 없습니다. 12월이면 둘둘 말린 수 십 개의 달력을 등에 진 달리기 장사꾼이 공업품과 식료품 등을 팔고 있는 장마당 매대를 돌면서 ‘달력 넘겨 받겠냐’며 묻습니다. 그러면 옷을 팔던 장사꾼이든 사탕을 팔던 장사꾼이든 여유가 되는 만큼 10~30개 정도의 달력을 넘겨 받습니다. 옷 매대나 사탕 매대에 달력을 놓거나 걸어놓으면, 옷이나 사탕을 사는 사람이 달력도 함께 사므로 하루 수익이 높아지기 때문이죠.
종합시장은 지붕이 있고 지붕과 연결된 나무 기둥이 매대 5~6미터 사이로 서 있거든요. 그 기둥 둘레에 못을 박아 달력을 걸어 놓으면 종합시장 풍경이 12월이면 달라집니다. 달력 가격은 12월 중순까지 가장 비싸고요. 12월 말이면 절반 내려가고, 1월이면 또 절반 내려갑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1월 중순에 달력을 삽니다. 단 1월에는 이쁜 달력을 사지 못하죠. 12월에 달력을 사는 사람들이 이쁜 달력을 골라 사고 나머지 달력을 사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행자 :한국에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관공서나 은행, 기업 등이 홍보 차원에서 만든 달력을 무료로 나눠 주는 곳이 워낙 많습니다. 그래서 선물용이 아니라면 달력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반면 북한에선 달력을 무조건 사는 분위기인 것 같은데, 그럼 그 많은 종류의 달력이 당국 차원에서 만들어져 팔리는 겁니까?
손혜민 기자 :네 맞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인민소비품을 정부에서 생산해 공급한다는 게 원칙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중공업에 예산을 집중 투자하니 달력을 생산할 종이가 긴장했죠. 결국 간부들에게만 달력을 공급하고, 주민들에게는 열두 달을 한 장에 제작한 연력을 공급했습니다. 북한에서 달력이 권력의 상징으로 부각된 이유였죠. 일반 주민들이 간부들의 집에서 해가 지난 달력을 한 장 얻으면 장식품처럼 집안에 붙이는 문화도 그래서 나온 겁니다.
하지만 장마당이 발달하며 달력 문화는 달라졌습니다. 2000년대 들어 돈을 번 주민들이 달력을 사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자 달력을 제작하는 개인이 등장한 겁니다. 물론 개인에게 제작 설비는 없었죠. 대신 돈이 있지 않나요. 설비가 있어도 종이나 자재 등을 공급받지 못해 가동하지 못하는 국영출판사와 개인이 손을 잡은 맥락입니다.
이 경우 정부가 제작하던 달력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 승인으로 국영출판사에서 제작하던 달력은 혁명가극 배우, 영화 배우, 김일성화 가꾸는 여군, 꽃피는 만경대 등 선전용 화보 밑에 12개월의 날짜를 표시했습니다. 당시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유행할 때인데, 선전용 달력을 누가 좋아하겠나요. 만약 개인이 선전성이 강한 화보 달력 제작에 투자한다면 원가도 뽑지 못합니다.
달력이 시장상품으로 자리매김하자 2010년부터 달력제작에는 평양종합출판사뿐 아니라 군부 강연자료 등을 찍어내던 군 출판사까지 나섰습니다. 하지만 달력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곳은 외국문출판사가 유일합니다. 해마다 북한에서 제작되는 수많은 종류의 달력을 보면 외국문출판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거든요.
다른 출판사는 중국을 통해 종이나 잉크 등을 수입해 달력을 제작하므로 외국문출판사보다 원가가 들어갑니다. 반대로 외국문출판사는 해외 출입국이 상대적으로 수월해 그런지 모르겠지만, 종이나 잉크 등을 수입하지 않고 달력 도안만 중국 공장에 의뢰해 달력을 제작하거든요. 이렇게 제작된 달력을 중국 주재 영사관이나 상주대표, 북한과 연결된 조선족 사장들에게 배포하고, 나머지를 북한으로 들여와 전국에 유통하다 보니 다른 출판사보다 경쟁력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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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북한 달력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북한 요리나 관광지, 풍경 사진 등 달력 종류도 생각보다 많았고, 달력마다 주제가 다 다르더라고요. 북한에서 주민들에게 제일 인기 있는, 가장 많이 팔리는 달력은 어떤 겁니까?
손혜민 기자 :주로 풍경화, 도자기, 영화배우, 한복, 요리, 평양거리, 삼지연거리, 얼음축제 등 정말 다양한 달력들이 제작되는데요. 지난해부터는 미사일을 실은 장갑차를 비롯한 군사용 무기를 화보에 담은 달력까지 제작해 주민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죠. 이런 달력은 가격도 쌉니다. 북한 주민들이 좋아하는 달력은 어린이 달력, 풍경화, 요리 등으로 알려졌습니다.
사례를 든다면, 2003년 평안남도에서는 돈주의 자식들을 달력 화보에 내주는 대가로 한 명당 50달러를 받았습니다. 자기 자식이 달력 화보에 실려 전국의 가정집마다 배포되는 것에 돈주 부모도 만족했고, 특히 아기 달력을 사는 주민들도 좋아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배우나 풍경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도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 배우를 달력에 실었는데요. 대표적으로 ‘민족과 운명’ 차홍기 편에서 박정희 시대 홍영자 역을 맡은 오미란 배우였죠. 오미란 배우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이 1970년대 한국 문화였는데, 북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련미 그 자체였습니다.
진행자 :애기 사진 있는 달력은 지금 나와도 잘 팔릴 것 같은데, 잘 안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손혜민 기자 : 2000년대로 다시 돌아가 말씀드린다면, 당시 개인이 직접 달력 사진을 선택하고 종이를 수입하여 국영출판사에 의뢰하여 달력을 제작했는데, 돌 지난 아기와 걸음마를 떼는 아기 등 귀여운 아기 달력이 많았습니다. 수요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인데요.
저도 아기 달력을 샀었는데, 가격이 비쌌지만요. 사심없이 웃고 있는 포동포동한 아기의 얼굴이 미래를 상징한다고 할까요. 그 달력을 보면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국영기관이 달력 제작을 다시 독점하면서 아기 달력을 대폭 줄이거나 없앤 것은 최고지도자나 백두산 풍경 등을 선전하는 달력보다 사상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자 : 2025년이 벌써 얼마 남지 않았죠. 내년 달력을 이미 구매한 북한 주민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지금 북한 주민들에게 달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손혜민 기자 :권력의 상징에서 문명의 상징으로 변화한 달력이 이제는 가정집을 꾸미는 인테리어 요소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란 배경에 빨갛고 노란 꽃다발 화보 달력을 집안에 걸면 분위기가 살지 않습니까. 반면, '주체 강국의 위상'이라든지, '미제침략자를 소멸하라'는 구호 밑에 미사일이 발사되는 화보 달력을 집안에 걸면 분위기가 어두워진다고 말하는 주민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북한 사회 방향을 엿볼 수 있는 현주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함께해 주신 손혜민 기자 감사합니다.
<장마당 돋보기>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