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라면, 김씨 일가와 그 친척들의 사생활에 대한 것이고 그 다음은 대남공작업무를 맡은 부서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대한민국이나 해외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한반도 전체를 김씨왕조 독재국가로 만들려는 야망은 여전히 김정은 시대에 와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작기구를 연락소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당에서 관장하던 대남공작기구들인 대외연락부, 사회문화부, 225국, 문화교류국 등을 노동당 연락부라고 부른데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해방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에 허가이를 책임자로 하는 연락부서를 만들고 남한에 있는 공산당 세력과의 연계를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1904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난 허가이는 소련공산당 지방당 간부로 근무하다가 해방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1945년 10월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1949년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그는 1951년 부수상이었던 김책이 사망하자 내각 부수상직을 겸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허가이는 박헌영이 숙청되자 1953년 자기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 허가이는 이렇게 죽었으나 김일성은 더욱 사활을 걸어 대남공작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노동당에는 대남공작업무를 맡아보는 ‘5호실’이 설치되었고 이 기구는 남한에 무장한 유격대를 파견하기 위해, 남한 출신 공작원들을 훈련시키던 ‘강동정치학원’을 지도하였습니다. 강동정치학원은 남한의 공산좌익성향 청년들이 월북하여 사상교육과 군사교육을 받았던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강동정치학원에서 양성된 무장 게릴라, 남파간첩들은 태백산맥 일대의 빨치산에 투입되었는데 그 인원은 1948년 11월부터 1950년 3월까지 사이에 10차례에 걸쳐 총 2,345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대남공작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설치된 대남연락부 부장으로 소련파였던 임해가 선출되었습니다. 노동당 5호실 책임자이면서 대남연락부장을 겸임했던 임해는 이미 대한민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성시백과 그 조직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성시백은 김구의 비서였던 안우생을 포섭해 1948년 4월에 북한에서 개최된 남북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김일성은 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6월에 노동당 조직부 산하로 있던 연락부를 중앙당의 정식 부서로 승격시켰으며, 6.25남침전쟁을 일으키면서 강동정치학원을 해체하고 1951년 1월에는 ‘서울정치학원’을 설립하여 전쟁기간에도 간첩양성을 계속했습니다. 김일성은 1951년 10월에는 ‘서울정치학원’을 황해북도 봉산으로 이전하면서 ‘금강정치학원’으로 개칭하였고 이와 별도로 인민군 최고사령부 직속으로 유격대 양성 교육을 위해 ‘526군부대’ 소위 유격지도처도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김일성의 대남통일전략에 따라 발발한 6.25남침전쟁이 1953년에 휴전상태에 놓이면서 김일성은 대남공작의 수장이었던 이승엽을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과 함께 처형하였고 남로당계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던 금강정치학원과 526군부대도 해체되었습니다. 대남공작의 수장이었던 이승엽이 숙청되고 그 뒤로 남로당 경상북도위원장으로 6.25남침전쟁시기 대구 팔공산에서 빨치산활동을 했던 배철이 연락부 총책으로 활동했고 그 이후로는 갑산파 출신으로 부수상까지 했다가 1967년 종파사건으로 처형된 박금철로 바뀌었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연락부는 간첩양성 방식을 ‘집단교육’, ‘집단남파’ 방식으로 진행하였으나 집단교육으로 양성되었다가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했던 많은 공작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대남공작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자 1958년부터는 간첩양성방식을 밀봉교육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북한에서 간첩을 남파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파견한 부장이나 노동당의 담당자만 알다보니, 훗날에 그 담당자가 죽으면 남한에서 활동하던 간첩선이 완전히 끊어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대남사업에서 전담기구 등 연락선이 많아지면 간첩들이 노출될 위험이 많은데 따른 조치라고 할 수 있겠죠.
전후에 남로당 당수출신으로 월북하여 김일성의 제2인자로 활약했던 박헌영이 처형되면서 남로당계였던 이승엽도 처형되었고 대남사업이 김일성이 직접 지휘하는 직할체제로 바뀌면서 1956년에는 노동당 내에 대남공작을 맡아보는 문화부가 신설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당국은 남한의 국가기밀을 수집하고 남한사회를 혼란시키기 위한 지하당 구축이나 테러·암살 등 비공개적이고 비합법적이며 폭력적인 형태의 활동을 일반적인 대남사업과 구별하여 ‘대남공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지시로 1961년 1월에는 노동당 연락부와 문화부, 민족보위성 정찰국, 내무성 반탐정처 등 북한의 대남공작기구들을 종합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구로 ‘연락국’을 창설했다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에 의해 5.16군사정변이 발발하자 1961년 11월에 노동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으로 연락국을 해체했습니다.
남한에 군인출신들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고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에 대비해 강력한 군사력을 시사하는 한국의 대북정책이 세워지자 김일성은 무력통일전략을 제시하면서 1964년 2월에는 대남사업총국 형태로 대남공작기구를 부활시켰습니다.
‘대남사업총국’으로 부활하면서 대남사업총국장으로 임명되었던 이효순이 1967년 5월 박금철 등 갑산파 종파사건을 계기로 숙청되고 인민군 총참모장이었던 허봉학이 대남사업총국장에 임명되었으나 그마저도 ‘좌경 군사모험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김일성이 인민군 현역 대장이었던 허봉학을 대남사업총국장에 임명한 것은 당시 베트남전이 확전되면서 주한미군이 베트남전에 투입되고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생긴 공백을 이용하여 다시 무력통일을 하려고 시도한데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허봉학이 숙청되면서 김일성은 김중린을 대남공작 총책임자로 임명하였고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김정일이 대남공작사업을 지휘하면서 김일성은 문화부를 통일전선부로 개편하고 김중린을 통일전선부 부장 겸 대남사업담당 비서로 임명했습니다. 김중린은 문화부장으로 활약할 당시에 한일국교 정상화 조치가 이루어지자 재일동포들을 대남공작사업에 끌어들일 계략을 김일성에게 허락을 받고 이들을 포섭하여 남한에 침투시키는 공작사업도 추진하였습니다. 김정일은 대남공작을 지휘하면서 허담이 통일전선부장을 할 때에도 그에게 실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허담은 김일성의 사촌여동생인 민주조선사 책임주필 김정숙의 남편으로 훗날에는 북한의 외교부장을 지냈던 인물이죠.
김정일은 연락부의 후신인 사회문화부와 1964년 대남공작 강화 조치와 함께 신설된 조사부,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조사부에서 분리 승격된 작전부 등의 대남사업부서를 직접 관장하였고 모든 대남공작사업은 김정일의 비준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김정일이 대남공작 부서들을 중앙당과 군부들에 두고 서로 경쟁적으로 운영하게 함으로써 노동당 소속의 대남공작기구들과 인민군 정찰국 사이에도 서로 성과를 내기 위한 경쟁이 유발되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공산적화를 위한 대남공작사업으로, 간첩으로 양성되어 남파되었다가 희생된 공작원들의 숫자는 정확한 통계를 숨기고 있어 알 수 없으나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김씨 일가의 부귀영화를 위한 현대판 봉건왕족국가의 노예로 귀중한 생명을 잃은 그들의 희생을 역사는 반드시 기록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