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첫 정착과정에 가장 힘들었던 건..

0:00 / 0:00

내가 남한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업무 부담이 아니었다. 언어예법과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었다. 일단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님"자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 여간만 생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님'자를 말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님'은 오직 김씨 일가의 존칭어로만 허락되어 있다. 일반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님"이 딱 하나 있다면 학교에서 부르는 "선생님"이다. 그 것마저도 김정일의 첫 호칭이 "친애하는 지도자선생님"이어서 가능할 수 있었다. 어머니란 말도 북한 문학은 수령 일가에게만 어머님이라고 허용한다.

그래서 북한 문학에서 '어머님'이라고 할 때에는 그 앞에 이름 석자가 별도로 붙어있지 않아도 당연히 수령의 생모로 인정된다. 나는 연구소 간부들 앞에서는 그럭저럭 "소장님", "팀장님"이란 말이 쉬웠다. 그러나 나와 나이가 같거나 아래인 행정 실 직원들에게는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졌다.

차라리 아예 마주서지 않는 편이 더 편했다. 선배들은 나이가 위일 때에는 직함을 사용하여 "연구원님"이라고 부르고 나이가 아래이면 이름과 함께 뒤에 "씨"라고 불러주면 된다고 했다. 그 가르침대로 행정 실 직원을 일부러 찾아가 처음으로 "곽수철 씨"라고 불렀을 때에는 자신이 비로소 남한 국민이 된 것처럼 뿌듯하기도 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전체주의 북한은 나이나 직급이 위이면 무조건 동지라고 하고, 그 반대이거나 동급이면 동무라고 한다. 충성의 동지이고 우정의 동무인 셈이다.

그렇듯 호칭의 등급이 상하로 명백히 구분돼 있어서 충성과 복종의 관계도 법적 요구이기 전에 윤리의 요구로 된다. 애인 사이에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를 동지라고 하고 남자는 여자를 동무라고 부른다. 만약 한국처럼 '자기'라고 다르게 부르면 항상 가슴에 초상화 베지를 달고 다니는 수령님이 '남'이 되고 '무시'되는 개인우상주의의 변심으로 간주될 것이다. 개인의 사심마저 독점하겠다는 수령이기주의의 언어독재만 알던 나여서 남한의 언어예법이 참말로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똑같은 언어인데도 그 쓰임과 깊이가 너무 차이가 나 마치 자신이 한국말을 처음 배우는 유치원생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소심하게 했던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매 문장에 특별히 신경 써서 붙여야만 하는 '시옷'받침이었다. 통전부 현지화 교육에서 배운 한국의 존칭어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자기를 낮추어서 상대를 높이는 상대존칭이고, 두 번째는 "하세요.", "하시다."와 같이 동사의 어간에 "시옷"자를 높여 쓰는 보통 존칭이다. 세 번째는 끝 말이 군인 식으로 무조건 "하십니다". "하셨습니까"로 끝나는 극 존칭이다.

북한에는 상대존칭과 극존칭만 있고, 가운데 보통존칭은 없다. 명령과 복종의 단순 구조여서 위에서 "하라!"고 지시하면 아래서는 "알았습니다."로 대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신 북한에는 어떤 간부라도 감히 쓸 수 없는 절대 존칭어가 있다. 다름 아닌 수령 존칭어이다. 그 특징은 "시옷"받침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인민은 "하다."로 수령은 "하시었다."로 차별화된다. 특히 형용사에서 더욱 엄격하게 준수된다. 만약 어느 간부의 행동을 평시에 그렇게 존중하고 더구나 문학에서 묘사했다가는 개인숭배주의자라는 정치적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 일상 생활에서는 물론 모든 문학에도 엄격히 준수될 만큼 법적으로 수령과 인민의 언어 경계가 그 "시옷"받침에서 갈라지는 것이다.

북한 같으면 수령에게나 써야 할 그 '시옷'받침의 절대 존칭어가 남한에선 아무에게나 지켜야 하는 예의범절이어서 크게 실수할 때가 많았다. 한번은 연구소 소장과의 사석에서 "내 보고서를 읽어봤어요? 읽어본 소감을 어디 한 번 말해봐요"라고 말해 주변 사람들을 크게 웃겼던 적도 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북한의 언어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경우 나를 건방진 자식, 재수없는 놈이라고 욕할 것 같아 나는 누구를 만나도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다.

남들에 대한 배려도 중요하지만 초면이냐, 구면이냐. 혹은 선배이냐, 후배이냐를 따져 지켜야 할 나의 자존심도 소중해서 더욱 갈등이 심했다. 남한 정착의 내 첫 걸음마는 그렇듯 한국말을 다시 새롭게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그 훈련은 남을 존경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을 깨닫는 귀중한 긴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