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 교수님, 서방 지식인들은 스탈린시대 소련 공산당을 열심히 찬양했지만, 정작 소련공산당이 자신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반 주민들이 보다 살기 좋은 정책을 펴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게 소련 첩보기관이 서방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기본 이유인가요?
란코프 교수 :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이유도 있는데요. 1950년대 들어와 소박한 지식인들이 소련을 특별한 국가, 매우 윤리적인 국가로 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1930년대 많은 지식인들은 소련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지도 않고, 그들이 전쟁을 한다고 해도 착취받는 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계급해방 전쟁이며, 대외정책에서 암투도 없이 약소국에 불평등한 조약을 부과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1920-30년대 국력이 약한 소련은 국제무대에서 많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열심히 믿는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1950-60년대 소련은 초강대국이 되었고, 세계 어디에서나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누구든지 알 수 있듯이, 소련의 대외정책은 자본주의 국가의 대외정책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파렴치한 독재자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약소국과 매우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자신의 영향권으로 생각하는 동유럽에서 반체제 운동을 참혹하게 탱크로 진압했습니다.
기자 : 한편으로 소련이 공산권의 반체제 운동을 탱크로 진압한 것은 매우 참혹한 정책을 많이 편 소련 당국자들로선 어쩌면 당연한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서방 지식인들이 어떤 배경에서 소련이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란코프 교수 : 제가 봤을 때 소련의 대외정책에서 놀랄 게 아예 없습니다. 무력개입도 하고, 암투나 불평등한 조약도 많이 맺었습니다. 강대국의 대외정책이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상주의자가 많은 서방의 지식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1950년대 들어와 그들은 소련을 위해서 위험한 일을 할 생각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1950년대 말 서방 선진국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나 좌파사상을 포기하고 우파사상으로 돌아섰나요?
란코프 교수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960년대 만큼 극좌익 사상이 널리 퍼졌던 시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선진국 젊은지식인들이 믿은 좌익사상은 소련식 공산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련은 이제 공산주의 낙원이 아니라 그냥 독재국가일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은 마오 주석의 중국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당시에 문화대혁명 시대의 중국은 스탈린 시대보다 더 끔찍했을 수도 있는데요. 그러나 1930년의 소련처럼 중국은 국제사회에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서방 지식인들은 중국의 상황을 잘 몰랐고 1930년대 스탈린 소련에 대해 꿈을 꾼 지식인들처럼, 자기 머리 속에서 환상속의 중국을 만들고 그것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기자 : 소련 첩보원들은 어떻게 됐나요? 이제 과거처럼 좌익 지식인들이나 청년들이 정보를 그냥 가져다 주지 않게 되었을 텐데요.
란코프 교수 : 네 그렇습니다. 옛날보다 상황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소련은 첩보활동을 많이 했고, 1920-30년대보다 국제 정치 무대에서 훨씬 열심히 활동했기 때문에, 첩보수집을 위해 더 많이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공산주의에 대한 사상 때문에 소련 첩보원들과 협력하고 싶은 사람을 찾기는 1950년대 말부터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그 때부터 소련 정보기관에게 비밀자료를 제공하는 사람 대부분은 돈 때문에 혹은 소련 공작원에게 협박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소련에 협력하는 사람들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끔 민족주의를 이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즉 러시아 사람이나 다른 소련 소수민족 출신이라면, 민족주의 때문에 소련에 협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 예외적인 일입니다. 이제 기본은 돈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은 당시에 1920-30년대보다 훨씬 강대국이 되어서, 공작원들은 보다 더 많은 공작금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기자 : 뭔가요?
란코프 교수 : 돈은 사상만큼 힘이 세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1960-70년대의 소련 정보기관에 대해서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비밀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것처럼 1920-30년대와 비교할 수 있는 큰 성공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상황에서 명문대학 출신이나 좋은 가문 출신자들이 소련에 협력하는데 별로 열정이 없었습니다.
기자 : 그렇다면 1960-70년대 소련 정보기관은 거의 성공사례가 없었나요?
란코프 교수 : 몇 가지 성공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초 주미 소련 대사관에서 활동하던 소련 공작원들은 그들을 감시해야 했던 미 중앙정보국 공작원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올드리지 에임스입니다. 그는 당시에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국가기밀을 돈을 받고 소련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 돈을 받고 국가기밀을 팔았다면 많은 돈을 사례로 받았겠군요.
란코프 교수 : 물론 큰 돈입니다. 그가 300-400만 달러 정도를 소련에게 받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당시에 미국에서 300-400만 달러는 큰 돈이었지만, 아주 큰 돈이 아닙니다. 그는 이 돈으로 잘 살 수 있었는데, 부인의 친척들에게서 받은 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에임스는 1994년에 체포되고, 국가반역죄로 기소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매우 가혹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에임스는 후기 소련 첩보활동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사상을 믿는 지식인이 아니라, 그냥 돈밖에 모르는 장사꾼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1950년대 말 이후 소련에서도 사상 때문에 소련 국가비밀을 미국을 비롯한 민주국가에 알려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1930년대 상황과 정반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 매우 흥미로운 상황인데요. 1950년대 말 이후 소련 관리들이나 공작원들은 자유민주주의를 흠모하고, 자기 나라의 비밀을 자유민주주의 나라에 알려주었다는 이야기인가요?
란코프 교수 : 네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가끔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공산주의 사상을 믿지 않게 된 사람들은 외국 지식인들 뿐만이 아닙니다. 소련 간부들도, 소련 특무기관 사람들도, 소련 경제일꾼들도 갈수록 사회주의 우월성에 대해서 의심이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비록 많지는 않지만 사상 때문에 첩보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1930년대 많은 서방 지식인들은 자신의 국가에서 체제가 무너진다면 올바른 공산주의 낙원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소련에서 젊은 간부와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진다면 행복한 자본주의 민주국가가 생길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대부분은 당연히 자신의 나라를 배신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민주국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1930년대 모습과 정반대 모습입니다.
기자: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