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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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지난 시간에 멀고먼 동유럽의 알바니아에 대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는데요. 1960-80년대 유럽에서 김일성의 북한과 제일 비슷한 나라는 알바니아였다고 하는 데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지난번에 조금 말씀드린 것처럼, 알바니아의 역사적 배경은 한반도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봉건시대가 오랫동안 이어졌고 낙후한 농업 지역입니다. 한편으로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자: 1930년대 낙후한 농업국가 알바니아는 왕정이었는데 갈수록 공산주의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알바니아는 어떻게 공산화되었나요?

란코프 교수: 알바니아 공산주의 역사는 흥미로운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유럽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은 거의 모두 1945년에 소련군대가 들어왔기 때문에 공산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스탈린의 기본 원칙입니다. 동구의 공산당들은 어느 정도 소련군대를 등에 업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나라는 두 개 뿐입니다. 하나는 유고슬라비아이고, 또 하나는 알바니아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알바니아 영토로 소련군대가 진입한 적조차 없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알바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군대의 도움도 받지 않고 왕정을 무너뜨렸나요?

란코프 교수: 조금 복잡합니다. 지난번에 말한 바와 같이 1920년대부터 파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 합병을 열심히 꿈꾸었습니다. 결국 이탈리아 군대는 1939년 4월에 알바니아를 침략했습니다. 알바니아 군대가 있기는 했지만 4천 명에 불과했고, 파쇼 이탈리아 침략군은 3-4만 명 정도였습니다. 결국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알바니아는 산이 많았고, 산악지역에서 유격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힘이 제일 센 유격대 세력은 알바니아 공산당이었고, 결국 공산당은 유격대의 핵심이 되었는데, 이웃 나라 유고슬라비아의 유격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는 영토문제 때문에 서로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양측 공산당은 영토문제가 아무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반동세력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얼마 후에 두 나라에서 공산당은 정권을 잡자마자, 옛날 영토 문제 때문에 미친듯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초 파쇼 독일과 파쇼 이탈리아 침략군과 싸우던 양측 공산당은 이러한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기자: 당시에 알바니아의 공산당 창시자는 엔베르 호자인가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아닙니다. 호자는 어느 정도 1930년대 김일성과 비슷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유격대 활동을 많이 했지만, 수많은 유격대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선택을 받았고, 갈수록 힘이 세졌고,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북한 선전 일꾼들이 김일성이 처음부터 유일한 유격대 지도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자도 비슷합니다. 호자는 공산당 창시자도 아니며 유격대 지도자도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호자는 잘 싸웠고 정치 능력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1943년 공산당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호자는 나중에 싫어하게 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 찌또(요시프 치토)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1944년 알바니아 유격대는 수도인 티라나에 입성했습니다.

기자: 알바니아는 조구 1세가 원래 다스렸는데요. 알바니아 왕실은 어떻게 되었나요?

란코프 교수: 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당시에 왕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많지 않았습니다. 조구 1세는 파쇼이탈리아 군대와 싸웠을 때 거의 역할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낙후한 옛날 알바니아의 상징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조구 1세의 아들은 1990년대 초 알바니아로 돌아왔습니다. 1997년 알바니아는 큰 혼란을 겪고 국민투표를 했는데, 국민투표의 질문 중 하나는 알바니아가 공화국이 될지 아니면 입헌군주제 국가가 될 지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망명한 왕의 아들은 당시에 30% 정도의 지지를 받고 거의 왕이 될 뻔했습니다. 이것을 감안하면 알바니아 국민들은 1940년대 왕을 싫어했던 것보다, 1990년대 호자와 공산당을 훨씬 더 싫어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1944년에 인기가 없어서 망명한 왕의 동상은, 지금 알바니아 수도에 당당히 서 있습니다.

기자: 낙후한 알바니아는 공산국가가 되었는데요. 호자는 권력을 잡은 다음에 어떤 정책을 폈나요?

란코프 교수: 호자는 권력을 잡자마자 유고슬라비아를 적대시했습니다. 물론 얼마 전까지 파쇼군대에 맞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 알바니아 공산당은 많이 협력했습니다. 하지만, 양측 공산당 모두 자기나라에서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옛날 영토 문제 때문에 적대감이 높아졌고, 뿐만 아니라 1948년에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 사이가 빠르게 나빠졌고, 찌또는 소련 통치자 스탈린에 도전했습니다. 1940년대 말부터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는 매우 시끄럽게 상대방을 비방했습니다. 소련뿐만 아니라 소련을 따라간 사회주의 국가들은 모두 다 유고슬라비아를 열심히 비난했습니다. 공산권 나라들은 '찌또는 미국 간첩이며 파쇼 졸개이며 미친 독재자'라고 주장했고, 유고슬라비아와 관계가 있던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했습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는 당연히 스탈린이 미친 살인 독재자라고 주장했고, 그를 지지하는 중국 모택동은 오늘날의 봉건통치자이며 양심이 없는 현대판 황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찌또의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소련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조건이 열악한 수용소로 보내 버렸습니다. 당연히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이든 중국이든 스탈린이든 모택동이든 전부 다 수정주의자라고 했고, 자신들만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찌또는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는 진실을 처음부터 인정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은 북침 거짓 선전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기자: 하지만 나중에 찌또는 중국과 북한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1970년대 북한 언론에서 찌또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란코프 교수: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정치입니다. 찌또이든 모택동이든 사상보다 자신의 국가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치인들이기 때문입니다. 1940년대말 찌또는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소련과 싸울 필요도 있었으며, 소련과 좋은 관계였던 중국이나 북한과도 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와선 완전히 다른 상황이 펼쳐집니다. 70년대 찌또도, 모택동도, 김일성도 소련에 대해서 경계심이 있기 때문에 서로 손을 잡을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옛날에 했던 말은 아무 가치가 없게 되었습니다. 1940년대 말 서로 열심히 비난했던 정치인들은 70년대에 서로 열심히 극찬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이러한 전례가 너무 많습니다.

기자: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