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민주주의를 외쳤던 소련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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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개인∙정치적 자유를 요구했던 1980년대

- 일당제 폐지∙자유선거∙언론자유 요구했던 소련 국민

- 고르바초프, 민주주의를 도입할 생각 없어

- 젊은 기자 중심으로 신문∙방송 등이 체제 비판에 앞장서

- 경제 상황 악화할수록 체제 불만 급증, 결국 소련 해체


1980년대에 소련 국민은 경제 상황에 큰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 젊은 지도자인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등장했고요. 국민은 그에게 적지 않은 기대를 했지만,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시장경제보다는 계획경제를 계속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럴수록 경제 상황은 더 나빠졌는데요. 그렇다면 소련 국민 사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어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란코프 교수님. 저희가 지난 시간에 1980년대 소련의 경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그런데 해외에서 소련을 지켜본 사람은 1980년대 소련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선호하고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공산당에 도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인가요?

[란코프 교수]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이 주장에는 문제점이 아주 많습니다. 소수 지식인은 정말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 그리고 정치 참여권 등에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들은 경제를 약간 무시하면서도 정치적 자유가 있으면 거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이는 당연히 매우 소박한 희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일당제를 폐지하고, 수많은 정당이 자유선거를 통해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그들은 당연히 북조선 국가보위부에 해당하는 케게베의 해체를 요구했고, 언론도 검열과 공산당의 지도가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소련 사람은 민주주의를 요구했는데, 민주주의를 목적보다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교수님, 민주주의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란코프 교수] 소련 사람들은 잘 사는 자본주의 국가를 볼 때 이들 국가가 거의 빠짐없이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당시에 소련 인민 대부분의 논리는 "민주주의가 있어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이 공산당을 비난하고 자유 선거를 요구했을 때, 이것은 민주주의와 자유선거보다는 경제성장, 그리고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의미했습니다. 쉽게 말해, 소련 인민들은 민주주의를 하면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 소련 인민들 사이에서 민주주의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인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인가요? 또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어떤 대책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끝까지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도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개량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가 민주화 정책을 도입했을 때에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공산당이 옛날처럼 엄격하게 언론을 통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언론의 자유를 절대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또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언론이 사회주의의 기본원칙을 비판하거나, 레닌이나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언론에 대한 통제가 많이 완화되자, 애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했던 젊은 기자들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소련체제의 경제∙사회 문제를 열심히 비판했습니다. 원래 소련언론은 북한 언론처럼 재앙이나 나쁜 소식을 거의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말에 들어와 사회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사람들은 해외 생활을 원래 주로 소문으로 알 수 있었는데, 당시에 자본주의 나라에 대한 보도와 기사도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소련 체제에 대한 실망은 빠른 속도로 확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언론의 비판보다 더 심각한 것은 빠른 속도로 나빠지던 경제 상황입니다. 소련에서는 1940년대 말부터 배급이 없었고, 대도시에서 누구든지 아무 때나 상점에서 기본 식량과 소비품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들어와 배급이 다시 생겼고, 기본 식량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 당시 젊은 기자들이 소련의 사회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했다고 하셨는데요. 소련 당국의 통제나 탄압 등은 없었나요?

[란코프 교수] 고르바초프 시대가 시작한 이후 1987년까지 가끔 문제가 발생하긴 했습니다. 물론 비판 때문에 해직을 당하거나 이런저런 문제가 생긴 사람은 있었지만, 감옥에 간 기자는 없었습니다. 또 1988년 이후부터 소련 체제를 많이 비판하는 기자라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 그렇군요. 교수님, 그렇다면 브레즈네프 시대나 스탈린 시대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도 있지 않았나요?

[란코프 교수] 그런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말 소련 사람 대부분은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는 방법이 거의 없는 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대부분은 체제를 바꾸면 짧은 시간 이내에 미국이나 독일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라파(유럽) 나라의 생활을 잘 아는 소련 사람들은 옛날 시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소수민족 문제도 많이 첨예화되었습니다.

- 교수님, 소수민족 문제가 첨예화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란코프 교수]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80년대 들어와 소수민족 일부는 소련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이 그렇습니다. 코카서스 산맥에 위치한 그루지야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그루지야는 스탈린의 고향입니다. 여기는 지금까지도 스탈린에 대해 매우 높은 평가가 있는데, 역설적으로 반공산당, 반사회주의 감정도 매우 심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말에 들어와 애초 독립운동이나 반공사상이 거의 없던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이 발생했습니다. 당시에 대부분 소수민족은 러시아 국가에서 벗어나면 정말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소련을 제국주의 국가, 그리고 가맹공화국에 대해서 소련에 약탈당하는 식민지 국가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제생활이 나빠질수록 독립에 대한 요구가 더 커졌고, 결국 1990년 즈음에는 소련의 해체가 머지않은 미래의 문제가 돼버렸습니다. 소수민족의 독립운동, 공산당에 대한 인민 대부분의 실망이 소련국가의 기반을 빠른 속도로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소련체제를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결국, 1991년 12월에 소련은 해체되었고 15개 공화국이 생겨났고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사임했습니다.

- 네.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고르바초프 시대도 결국 막을 내리고, 소련은 해체되고 말았군요. 공산당에 대한 실망이 결국 소련의 기반을 파괴했다는 역사가 인상적입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고르바초프가 사임한 이후 시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고맙습니다

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